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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책들의도시
  • 백의 그림자
  • 황정은
  • 10,800원 (10%600)
  • 2010-06-25
  • : 7,372



「백의 그림자」는 숲에서 길을 헤매는 두 남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림자를 쫓아가다가 길을 잃은 은교, 그리고 그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는 무재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도무지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아리송하다. 확실한 것은 무재는 은교를 좋아하고, 은교도 그런 무재가 싫지는 않다는 점이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사십년 된 전자상가, 은재와 무교의 일터이다. 그런데 이 전자상가가 철거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켜 수많은 작은 가게들이 밀집해있는 전자상가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은교와 무재의 이야기와 함께 이어진다.
빚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아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 기러기 아빠로 힘들게 살아가는 가장, 왕따로 인해 학업을 중퇴하고 전자상가에서 일을 시작한 점원 등 은교와 무재를 비롯한 선량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문체나 어조, 이런것은 잘 모르지만「백의 그림자」는 대부분 짧은 문장과 대화로 이루어져서 담담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언어유희라고 해야할까,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같은 반복되는 단어들이 이루는 문장들이 뭔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같은 문장을 몇번이나 곱씹으며 읽게 된다. 여기에서의 가마는 머리에 있는 그 가마이다. 

가마는 가마지만 도무지 가마는 아닌 가마라면 가마란 대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는 틈에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어리둥절해진 채로 앉아 있었다. (39쪽)
내가 이렇게 어리둥절해진, 아리송한 느낌으로 책을 읽어나갔던 것 같다. 그렇지만 점차 여러 등장인물들이 가진 개인적인 사연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점차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애인사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은교와 무재의 담담한 사랑 이야기도 계속 이어진다.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그림자, 책의 시작부터 이 그림자의 정체가 가장 의아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림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어간다. 그렇지만 나는 읽어가면 갈수록 어느 순간 그림자의 존재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여전히 난폭한 이 세계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 몇 있으므로 세계가 그들에게 좀 덜 폭력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난폭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 책속의 선량한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따뜻함을 느꼈다. 은교와 무재, 여씨 아저씨, 오무사 할아버지, 유곤씨 등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이 난폭한 세계에 적응하기 힘들어보이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난폭한 세계, 비정한 사회의 모습은 씁쓸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존재하는 선량한 사람들의 존재가 난폭한 세계에 여전히 희망을 갖게 한다.  
「백의 그림자」는 뭔가 뚜렷하게 정리가 되는 그런 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좋다. 정말 좋기 때문에 좋다, 라는 말이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책 뒷편에 써진 문학평론가의 표현처럼,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46쪽)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지고, 빚의 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전심전력으로, 그 틈에 불어나는 먹고 사는 비용의 빚을 져 가는 일의 연속. (93쪽)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5쪽)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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