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전세계적인 인기로 인기 작가가 된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신작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가 나왔다.「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영화화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도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라오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그게 소설의 매력이기에 나도 재밌게 읽었었다.
그리고 요나스 요나손이 낸 두번째 소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역시 전작의 인기 때문인지 출간되자마자 인기가 많다. 나도 그러한 독자 중에 한 사람이라서 그의 신간을 구매해서 읽었다. 재미있다. 가독성도 좋다. 그렇지만 너무 전작과 비슷하다. 전작과 너무 비슷한 레파토리 때문에 재밌게는 읽었지만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빈민촌 소웨토의 공동변소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섯살 때부터 분뇨통을 나르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소녀 놈베코는 빈민촌의 다른 사람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숫자에 대해서만큼은 천재성을 타고 났다. '까막눈이'는 소웨토의 빈민촌의 흑인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당연히 글자를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백인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어느 날 그녀는 동료들 앞에서 이 <변화>는 그들 모두의 삶에도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장이 정치 얘기를 한다고 투덜거렸다. 온종일 똥을 나르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이제는 똥 같은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 p. 33
다섯살부터 자기 몸뚱이만한 분뇨통을 나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셈을 하면서 숫자에 대해 천재성을 가진 놈베코는, 숫자 뿐만 아니라 눈치도 빠르고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열네살에 공동변소의 관리소장이 된 놈베코는 변태, 호색학이지만 소웨토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알고 문학 애호가인 옆집 타보 아저씨를 통해 글자도 배우며, 라디오를 들으며 똑똑하게 말하는 방법도 터득한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다이아몬드 28개를 얻게 된 놈베코는 빈민촌은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 말라깽이 소녀가 나중에 커서 왕들과 대통령들과 사귀고, 열국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세계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고 상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맞는 말이다. 만일 그녀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그녀는 그녀였다. - p. 18
빈민촌을 탈출한 놈베코는 여러가지 우연한 사건들과 복잡한 사정 끝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핵폭탄을 개발하는 비밀 연구소 펠린다바에 갇혀서 청소부이자 하녀로 지내게 된다. 그렇지만 재능 없이 부친의 권력으로 남아공 최고의 핵전문가가 된 연구소장인 엔지니어를 도우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폭탄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엔지니어의 실수로 원래는 만들려고 했던 6기 외에 하나의 핵폭탄을 더 만들게 되고, 이 핵폭탄 때문에 놈베코의 험난한 여정이 계속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험난한 여정을 보내는 놈베코의 이야기와 더불어 스웨덴 왕립 우체국의 말단 직원인 잉마르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된다. 어릴적 우연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에게 머리를 쓰다듬게 된 잉마르는 그 후로 스웨덴의 가장 열렬한 군주제의 지지자가 되어 다시 국왕을 만나기 위해 말도 되지 않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쌍둥이 아들 홀예르 1과 홀예르 2를 낳고 난 후에도 그의 국왕을 만나기 위한 여정은 계속된다. 그러나 우연한 구스타프 5세와의 만남 이후에 그는 이제 왕가를 없애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쌍둥이 아들 중 무뇌아라고 할 수 있는 홀예르 1은 아버지를 따라서 군주제의 열렬한 지지자였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과격한 공화주의자가 되어 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반면 한 명만 출생 신고를 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들인 홀예르 2는 달랐다. 그리고 홀예르 2가 핵폭탄을 가진 놈베코와 스웨덴에서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합쳐지고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기이하고 험난한 여정을 살아가는 놈베코가 100살 쯤 되어서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면 '분뇨통을 벗어 던진 까막눈이 여자' 정도의 이야기로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핵개발 엔지니어, 이스라엘의 정보국 요원, 열렬한 군주제의 지지자였다가 과격한 공화주의자가 된 아버지와 쌍둥이 형, 은행가 아버지를 두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어 과격한 공화주의자 쌍둥이 형과 연인이 된 휘발유녀, 한나라의 토우를 위조하여 파는 중국인 세 자매 등 비정상적인 등장인물들과 비정상적인 상황이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놈베코와 홀예르 2의 고군분투기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홀예르가 물었다.
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어. 놈베코가 대답했다. 왜냐하면 삶이란 원래 이런 식인 것 같으니까. -p. 227
이 소설은 1960년대부터 2010년까지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책 속에 나오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 개발과 포기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핵무기 6기가 개발되었다가 모두 폐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 언급되는 넬슨 만델라를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 갈등과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사실 나도 예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라서 모두 흑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백인이 많아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핵무기의 개발과 폐기라는 역사적 사실을 비롯한 스웨덴의 군주제,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이야기는 전작만큼이나 절묘하고, 기발하고 재미있다. 그리고 정치와 권력에 대한 풍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몇십년동안 핵폭탄과 함께 살아가는 놈베코를 통해서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핵폭탄이 주요 소재라는 점, 서로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합쳐지는 것, 그리고 경찰에 쫓기는 상황 등 전작과 너무 비슷한 전개와 레파토리 때문에 재미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식상하다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수 없다. 사람에 따라 그렇겠지만 읽는 내내 전작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떠올랐다.
재밌는 소설을 써줬는데도, 재미있게 잘 읽어놓고도 투덜대는 나 같은 독자가 까탈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작 덕분에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에 그런것 같다. 소설이 줄 수 있는 기발함과 즐거움, 그리고 가독성도 좋은 이 책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놓칠 수 없는 책이다. 그렇기에 요나스 요나손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다려진다.

무심코 겉표지를 뒤집어서 봤더니 예쁜 보라색 바탕에 놈베코의 여정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읽고 나면 이 그림들이 다 이해가 간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안 뒤집어봤으면 어쩔뻔 했니. 이 표지도 너무 맘에 든다.
5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인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가독성 좋은 기발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찾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전작인「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