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그러는데?
이 책의 초반부는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생각 없이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삶에 대한 회의감이 겹쳐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나라 작가인 정세랑의 글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어린 시절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 대한 차별이 내가 받았던 경험과 일치하면서 숨통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동생 식구들과 친정집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코로나 예방접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2차 접종이 더 아프다고 입을 모았다. 동생이 “그런데 남자가 되 가지고 아프다면서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니까.”라고 말하니까 조카가 “엄마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러길래 내가 “왜 그러는데?” 하고 물으니 “남자가 그러면 안 돼, 여자가 그러면 안 돼 라는 말을 하면 모두 싫어하고 안된다고 그러던데?”라는 말을 했다. 나는 지금도 남성의 모습과 여성의 모습이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그 고정 관념이 깨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에 고무적인 순간이었다.
2.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이 책을 읽어 내기 힘든 것 중 하나는 어려운 단어도 한 몫을 차지했다. 그래서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는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 권리와 주체성을 확장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 및 운동을 가리킨다. 페미니즘은 19세기에 들어서 시작됐으며, 시대와 그 양상에 따라 크게 1세대, 2세대, 3세대 물결로 나뉜다. 1세대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 운동이었다. 2세대 페미니즘은 남성의 폭력성에 대한 고발 및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3세대 페미니즘은 다양한 성에 대한 수용과 성적 자기 선택권을 주장하고 있다.
페미니스트의 정의는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페미니스트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인 줄 알았다. “페미니스트는 절대 남성 혐오주의자의 동의어가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레즈비언에게 붙는 이름표도 아니고, 이성애자만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 그 밖에 젠더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사상가도 행동파도, 노동자도 전문직도, 운동선수도 예술가도 극빈자도 대통령도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학대받는 여성들의 문제는 아주 심각하므로 모두가 힘을 모아야만 해결할 수 있다.(169~170쪽)”라고 미아 드프린스&미켈라 드프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협한 지식을 넓혀준 대목이다.
3. 페미니즘은?
『나다운 페미니즘』을 읽으며 페미니즘과 관련된 글 중 내 가슴에 와닿는 메시지들을 모아봤다.
- 페미니즘은 어떻게 외모를 가꾸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사회적 기대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킨다. --55쪽
- 페미니즘은 신체 강박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다. 개인적인 게 곧 정치적이다. 자신의 몸에 강박을 느끼게 만들고 자신을 비판하고 억압하게 만드는 현상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73쪽
- 페미니즘이란 여성들에게 해를 입히는 고정 관념을 깨는 수단이기도 하다. --85쪽
- 페미니즘은 여러 층위의 권력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정신 질환을 대하는 우리 문화의 유해한 태도 또한 페미니즘이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다. --86쪽
- 진짜 페미니즘은 진정한 평등을 위한 것이고, 우리 모두의 안에 내재 된 인간성을 위한 것이다. --142쪽
- 우리의 페미니즘은 분노와 혐오, 남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페미니즘은 아버지와 형제, 아들, 삼촌, 사촌들의 지지를 받는, 인간의 운동이어야 한다. --156쪽
- 페미니즘은 인종과 종교, 장애 여부,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주자는 주장일 따름이다. --169쪽
- 페미니즘은 행동이다. --178쪽
- 페미니즘이란 스스로 선택하고 그대로 행동할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226쪽
- 페미니즘은 여러 생각과 믿음, 생활 방식과 열정의 집합체이다. 그 다양성이 페미니즘을 위대하게 만든다. --324쪽
4. 다양한 나다운 페미니즘 이야기
제시카 루서가 쓴 ‘페미니스트의 사랑’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고 있음인지 공감이 갔다.
“여자들은 안정적인 결혼 생활이나 가족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러나 결혼의 또 다른 당사자에게는 같은 요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여자들은 학대당하고 자아를 잃어 가면서도 침묵을 지켜야 칭찬받을 수 있다. 페미니스트의 사랑은 이런 메시지를 부정한다. 페미니즘적인 관계에서는 누구 한 사람의 감정과 필요와 욕구가 더 중요하지 않다. 모두 똑같이 존중받는다. 그게 페미니스트의 사랑이다.”---278쪽
완전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사랑은 그 자체로 결코 충분할 수 없다. 그냥 사랑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필수다. 상대와 페미니스트의 사랑을 나누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잊지 말자고 제시카 루서는 말한다.
2007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출판 문학계의 중심에 있었던 정세랑 작가의 글은 가슴이 먹먹했다. 추악했던 그 시절을 맞이한 사회 초년생 작가는 소설 속에서 그들을 복수한다.
“편집자의 업무는 흥미로웠지만, 술자리의 꽃 취급을 당했던 것은 역겹고도 역겨운 경험이었다. 술자리 접대를 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들은 편집자들을 험하게 대했고, 새벽에 전화를 걸어 왔고, 심한 경우 만지기도 했다. 최악의 경험은 모 원로 작가의 문하생들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겪었다. 방송국 피디라는 자가 나를 만지고 내 눈앞에서 돈 부채를 만들어 흔들며 말했던 것이다.
“너, 나랑 내 러시아인 여자 친구랑 따로 한번 만날래?”
몇 년 후, 나는 그자를 소설에서 추하게 그려 복수 했지만 그 자는 그때의 일을 기억도 못하리라 장담한다. 가해자들은 매번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이기 때문이다.”(45쪽)
노바 렌 수마는 고등학교 졸업반에서 세계 인문 수업을 들었다. 수업 계획서를 보고 여자 작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왜 수업 계획서에 여자가 하나도 없죠?”라고 묻는다. 그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가 없어서”란다. 이 말을 듣고 선생님이 틀렸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성 작가의 책만 읽겠다 결심하고 5년가량 여성작가의 책을 읽었다. 여성 작가들의 책만 읽게 되면서 금세 여성 작가들이 가치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여성이 주인공인 청소년 소설을 4권이나 쓸 수 있었다.
코트니 서머스는 소설의 세계는 호감의 규칙이 지배한다고 했다. 여성 인물은 다른 무엇보다도 호감이 가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독자의 이상에서 어긋나니까. 하지만 그는 본인의 『올 더 레이지』라는 소설 속 여성 주인공을 까칠하게 그렸다. 자기 고통을 숨기지 않더라도, 남의 호감을 사려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여성에게는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 인생의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했다.
애슐리 호프 페레스는 ‘착한 여자’가 되기를 강요받고 있는 사회에서 이를 깨기위해 노력했다. 말대꾸하지 않는 ‘착한 여자’가 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손하고, 사려 깊고, 상대의 말을 경청할 준비가 된 말대꾸를 하고, 누군가에게는 참견으로 보일 행동이 연대의 행위다고 했다. ‘착한 여자’라는 다른 사람의 틀에 스스로 욱여넣고 매순간 남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착한여자’를 관두자고 했다.
5. 나다운 페미니즘
딸이 어느 날 “엄마! 내가 친구들 만나고 나서 엄마한테 고마운 것이 있었어. 뭐냐면 오빠하고 나하고 차별하지 않고 키워서.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엄마 아빠가 오빠와 자신을 차별해 키웠다고 열을 내더라니까.”라는 얘기를 했다. 내가 자랄 때는 남동생과 차별을 많이 받고 자랐으나 내 아이를 키울 때는 의식적으로 아들과 딸을 구분해 키우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아들이나 딸이 주장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5살이 된 딸아이가 치마를 입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쁜 치마를 입히고 싶은 나의 마음을 내려놓고 유치원도 반바지를 입는 곳으로 보냈던 기억이 있다. 딸이 얘기한 것처럼 아들딸을 차별하지 않고 키우고, 딸의 주장을 꺾지 않고 잘 들어 준 것 또한 나다운 페미니즘의 실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처음 접할 때 들었던 답답함과 회의감이 책을 다 읽고 나니 해소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작은 것들이 몸에 체화되어 나도 모르게 나다운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활동했던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내 아이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겨레의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는가!
켈리 젠슨은 “페미니즘은 그때나 지금이나 화려하지 않다. 내 강점은 듣기와 생각하기, 평가하기와 지지하기인데 이것들은 눈에 잘 보이고 귀에 잘 들리는 다른 페미니스트들의 강점만큼이나 중요하다. 나의 페미니즘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시끄러운 사람과 조용한 사람들이 함께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나의 목소리에는 똑같은 무게가 있다. 그 목소리를 사용하는 한, 누구나 자기 나름의 독특한 마법을 부릴 수 있다. 당신의 마법이 중요한 건, 당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374쪽)”고 했다.
내가 내는 목소리가 보잘 것 없다 생각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것들이 모여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나다운 페미니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