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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피움
  •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 에쿠니 가오리
  • 8,100원 (10%450)
  • 2006-10-23
  • : 4,839

어렸을 때, 엄마가 아파 누우면 외로웠다.

온 집 안에 우울함이 고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에 들어서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조바심을 내면서도 나긋나긋한 병의 기척을

나는 아주 민감하게 감지했다.

……

아빠는 나와 엄마를 위해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요리인 프렌치 토스트를 만들어 주었다.

프렌치토스트와 우유.

내게 그것은 엄마의 병의 맛이었다.

p54

 

글을 읽자마자,

박범신의 [은교]가 떠올랐다.

은교에서 이적요 시인은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드릴 까요, 라고 말하는 은교에게

'뾰족한 연필은 슬프다'며, 가난한 어린시절 등교길에

달그락 달그락 거리는 그 필통 속 연필 소리를 좋아했었는데,

결국엔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안됬을때,

그 소리를 못 듣는게 너무 슬펐다고.

그래서 자신에게 연필은 슬픔이라고.

말하는 장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엄마가 유일하게 선물해준 안나수이 공주거울을 떨어뜨리고

서지우에게 '엄마가 사준 거란 말야! 어떻게 똑같아!'

라고 말하는 은교,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서지우가 떠올랐다.

사실 이적요나 은교보다 서지우가 떠올랐다.

서지우는 내게 불쌍함이다.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 아주 슬픈 일이다.

p125

 

그런거다. 얼마전 넝쿨당에서 나온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옛날사람이라 세련되지 못했고,

내가 이렇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보아왔기에

안해야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고 있더라'

전에는 깐깐하고, 진짜 '옛'이라고 느껴지는 생각들을, 말들을,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저러나 싶기만 했다고 해야겠지.

근데, 그들이 봐오고 해오던 것을 그런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는 있어도 이렇게는 절대 하지 못한다.

그게 사람인 것 같다.

 

 

 

   이 책은 열 명의 여고생의 여섯가지 이야기를 담아냈다. 내가 여고생에서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일까, 바로 전에 읽었던 <당신의 주말은 몇개 입니까>보다 훨씬 동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전책이 내 미래에 대한 일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이 책은 나의 과거, 그 소중했던 시간의 단편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가 잊고있던 나의 여고시절의 단편들,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흐려졌고, 감쳐져 있던 것들.

   '날마다 학교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세계의 요모조모를 전하는 지구촌 뉴스 같다. 교실이란 그런 곳이다.11p'

책을 읽으며, 한동안 잊고있던 그때의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당시의 지금에 충실히 공부하고 사랑하고 우정에 목매고 친구들과 떠들고 웃고 같이 울기도 하고, 그때의 그 기억들...... 그 때는 왜 그리도 공부하기도 싫고 다 답답하기만 했을까, 대학을 갓 들어오자마자 그 당시의 소소했던 행복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었는데 말이다. 친구들과 같이 야자하면서 몰래 연예인 영상이나 영화를 보고, 수업시간 쌤을 졸라서 야구경기를 보고, 아침에 나죽네너죽네 하며 언덕길을 헐떡이며 지각하지 않겠다고 뛰어오르고, 먼저 급식 받으려고 내달리던 그 순간들도, 복잡복잡했던 매점도, 그 매점의 몽쉘통통과 오드(오렌지 드링크)도, 뒤에서 쌤 욕하고, 지루했던 장양쌤의 문학시간에 단체로 졸다가 혼났던 일도, 그러다가 뿅망치로 맞았던 일도, 여름 한창 더울때 에어컨 공사한다고 해서 집에서 바구니 들고와서 시원한 물 받아놓고 발 담그고 수업들었던 것도, 남자쌤들이 축구경기 하던 것을 신나게 응원하던 것도, 함께 했던 합창도, 함께 했던 배구대회도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책을 덮는 것과 동시에 하나하나 내 머릿 속에서, 마음 속에서 떠올랐다.

   남의 눈에 신경쓰고, 아니 때론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그렇게 지냈던 그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한데, 기억에서 잠시 사라졌던 그 기억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 이 책, 너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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