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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감
  •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 손보미
  • 11,700원 (10%650)
  • 2018-08-24
  • : 1,040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는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언제나 완전히 평등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불균등하고도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통해 누군가는 조금 더 듣고, 누군가는 조금 더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순도 백퍼센트 서로 그러한 성향이라고 한다면 상관없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므로.

 

​​그나마 그런 우려가 적은 것은 드라마,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사나 문장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갈증의 해소를 위해 소설을 읽고, TV나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말하는 순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위하여 이야기를 한다. 무단침입한 고양이처럼 사소한 행위 자체만으로도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존재하고 있을 뿐더러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특히 어떤 감정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산책 중에 등장하는 딸이나 임시교사인 P부인을 바라보는 부부의 시선처럼 모든 것들은 (그것이 의도적이든 반의도적이든) 왜곡되어 전달된다. <산책> 편에서 딸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남편처럼 위선을 말하는 자이다. 진실은 한 개인의 경험에 프레임에 갖힌 채 해석되고, 아버지의 입장을 아는 것은 작가나 독자들 뿐이다. <임시교사> 속 P부인의 경우에도 자신의 형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맡은 한 부부의 아이, 그 부부의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도 성실하게 맡은 바 역할을 다해왔다. 그녀가 잘못한 것이라곤 정식교사가 되지 못한 것 정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그녀의 한마디 참견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저 불쌍한 여자의 넋두리로 해석하고, 아쉬울 때면 P부인에게 부탁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부의 프레임 안의 P부인은 임시로 머무는 보모일 뿐이다. 물론 P부인은 타인으로서 역할의 한계를 인지하고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사는 건 그런 거라고,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라고. 그렇게 모든 것을 덮어둔 채로, 딸도 P부인도 모두 잠에 빠져든다. 마치 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균등히 존재하는 것은 시간이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어디에서나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허구 속 그들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사실상 별 의미도 없었던 호텔 <초이선>은 부재의 순간에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관심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아무 일 없을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시나리오 작가였던 그의 인생 또한 초이선 방화 사건과 얽힌 영화배우의 연설문 작성 대리 업무에서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호텔은 연장 대신 새로운 다른 문명인 대관람차로 대체된다. 그동안 그의 인생도 변한다. 그의 아이도 아내도, 그 여배우도 모든 것들과 함께 운명 속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고귀한 혈통 속 패리스 싱어>의 간략한 일대기에도 시간의 흐름은 균일하게 녹여져 있다. 강인했던 것 같은 어머니의 이사벨라를 비롯한 모든 것들은 나타났다 사라지고, 아이들은 탄생하고 죽는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나 명예, 부, 인기 등을 누리고 싶어하고,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누구는 그런 것들을 향유하고, 누구는 그 근처에도 가보지도 못한 채 죽는다. 이런 일대기들을 읽다보면 어쩌면 인생 자체는 그저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대한 최고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한다. 모든 일이 닥쳐와도 결국은 흐르게 마련이라는 다소 심심한 결론을 내려본다.

 

​<몬순> 속 발레리나였던 그녀의 이야기,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기억들에 대한 작가만의 독특한 구성이 재미있다. 기억이라는 것은 약간 개인적인 구석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혼여행에서 몬순을 맞이하는 순간, 신혼부부인 그들의 관계는 약간 변화됨을 엿볼 수 있다. 몬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계절풍 때문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신혼부부인 그들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편의 반응과 함께 신부였던 그녀가 기대하던 반응 같은 것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남편의 반문에 어떤 감정이 섞여 있는지 생각조차 못한 채, 앞으로 어떤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만 그녀는 생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에 남은 울음의 불안은 어쩌면 전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죽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각자의 기억만이 남아서 떠돌게 되는데, 결국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었음을 그는 깨닫는다. 기억을 잊고 있었던 그 자신은 그녀로 인해 현실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기억에 관한 한, 개인적이지만 결국은 또한 어떤 관계를 이어나가는 구실이 되는 매개체가 되는 셈이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느껴졌다면, 소설집의 마지막인 <고양이의 보은-눈물의 씨앗> 편은 작가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또다른 세계의 나 혹은 과거의 내게 좀 더 위로를 해주고 싶어졌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현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은 지금 겪고 무슨 일을 겪더라도 괜찮으니까, 앞을 보면서 좀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라고 하고 싶다. 어쩌면 미래의 나도 현재의 내게 그런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소설책을 덮는 순간, 눈물은 원래 따뜻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코 나약한 자가 흘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힘과 용기를 주는 뭔가라는 것. 그녀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을 이야기하는 것 속에서 어쩌면 스스로 겪어왔던 터널의 시간의 조각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그 과정을 통해서 흘려왔던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눈물들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다들 그렇게 눈물을 흘려왔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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