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수양서재
  • 읽다
  • 김영하
  • 10,800원 (10%600)
  • 2018-06-08
  • : 5,521
9년 전에 전작 <보다>를 보고 결심했다. 이 사람의 모든 산문을 다 읽어치우겠노라고. 그리하여 두 번째 책. 진도가 이렇다. 어쩌랴, 이게 딱 내 속도인 것을. 오래 살기를 바라야 하나? 그것은 더 싫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다. 나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된다. 그렇다면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28~29쪽
글쎄 이런 게 난 오히려 책에 빠진 사람의 오만이 아닌가 싶네. 책에 빠져 독서를 절대화하다 보면 이렇게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사실 자기만의 알고리즘에 의해 자기 믿음을 (그리고 에고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책을 읽어나가게 되는 것 아닐까. 우리는 밑도 끝도 없이 난데없는 책을 손에 들지는 않는다. 개인의 자발적 읽기라는 것은 대개 광맥이 뻗어나가는 식의, 자기 세계를 공고하게 형성하고 확장해 나가는 식의 읽기가 아닐지. 우리에게 분열을 안겨주는 것은, 그러니까 진정한 겸손을 가르쳐주는 것은, 차라리 낯선 사건의 체험일 것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관계, 새로운 언어, 거기서 움트게 되는 새로운 사고방식- 그러니까 판이 달라지는 새로운 게임.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게 나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갖는 공포심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 소설은 바로 그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라는 백도어를 이용해 침입한 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젠가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기 시작하지만, 이런 공포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작가와 작품에 의해 자기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성찰하게 된다. -172쪽 


귀퉁이를 눌러 접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문학이 매혹적인 동시에 매캐한 숲 같다고 느낀 적은 있어도 바이러스와 유사하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네. 균이라고 (가혹하게!) 규정하니 문학에 대해 품었던 그간의 모든 미심쩍 혐의들이 명석하게 정리가 된다. 그래, 균이었구나, 균이어서 그랬구나. 아마도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뉠 것이다. 보균자와 비보균자. 분류는 이것으로 족하다. 문학에 감염되어 급기야 죽어버리는 경우는 흔치 않을 테니. 어쩌면 보균자는 보균자를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낌새를 맡는달까. 문학적 낌새 말이다. <롤리타>, <파리대왕>, <보바리부인>, <죄와 벌>, <소프라노스> 등 책에서 알려준 몇몇 바이러스(!)들은 언젠가 꼭 접해보고 싶다. 이런 속도로 나아가다가는 죽기 전에 감염이나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