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관능적 언어로 소녀를 탐하는 노년을 욕하지 말라. 노년에게도 소년 소녀의 관능은 피부 깊숙이, 세포 깊숙이 살아 숨쉬고 있다. 서글픈 현실에 막혀 숨쉬기를 잠시 멈추고 있을 뿐, 우리는 모두 소년 소녀였다. 그리고 반드시 노년이 된다. 숨쉬기를 멈추고 세포 깊숙이 감춰야만 하는.......
은교를 먼저 알게 된 것은, 매스컴을 통해서 였다.
신인 여배우의 파격적 노출을 대대적으로 어필하며, 70대 노인과 17세 소녀의 파격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라고 홍보해댔다.
매스컴을 통해 접한 은교는 정말 매력없는 영화였다. 파격적 노출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홍보 문구는 더이상 거들떠 보고 싶지도 않았다. 70대 노인과 17세 소녀의 관능적 사랑의 서사시도 궁금하지 않았다. 매스컴에 낚여 후회 가득한 모습으로 극장 문을 나서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매스컴의 희생양이 되지 말자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영화 은교를 보지 않았다. 일부러.
몇년이 지나고, 얼마 전 우연치 않게 무료 티켓이 생겨 영화 '차이나타운'을 보게 되었다.
여주인공으로 분한 '김고은'이 영화 '은교'의 은교 역할이었다는 것은 녹색창에 '김고은'을 검색하고 난 뒤였다.
그리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설 '은교'가 궁금해졌다. 영화 '은교'가 아닌 원작 '은교'가 몹시 궁금해졌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소설 '은교'가 나를 끌어당겼던 것 같다. 17세 소녀의 관능미에 이끌리듯 그렇게 나는 소설 '은교'를 집어 들었다.
소설 '은교'는 책을 들고 있는 내게 마치 마법을 건 듯, 놀랍고도 감성적이며 치명적인 언어의 유혹으로 한번 잡은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새벽 2시까지 '은교를 붙잡고 앉아 있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추리소설도 아닌데, 나는 다음 장이 또 그 다음장이 궁금해 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소설 '은교'는 표면적으로는 70대 노인(이적요)과 17세 소녀의 부적절한 사랑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오랜 경험과 연륜을 쌓은 한 노년의 지난 날들의 대한 슬픈 고백과 가감없는 사랑의 언어로 가득찬 대 서사시였다. 70대 노인의 감수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눈부신 언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노인이 처음 은교를 대면하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마치 내가 은교가 된듯, 혹은 은교를 묘사하고 있는 노인이 된 듯, 그가 묘사하는 언어의 골자기를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었다. 내 감성을 그의 감성에 온전히 맡기고 그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 흔쾌히 빠져들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묘사와 언어를 한달반만에 완성했다고 하니, 소설가 박범신의 필력에 새삼 존경을 표하고 싶다.
또한 이 소설의 묘미는 절묘한 대조에 있다. 노인이 사랑한 17세 은교는 말수는 적지만 묘하게 붙임성이 있고, 관능적인 육체와는 대조적으로 천진하리만큼 순수한 미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은교에 비해 은교를 묘사하는 노인은 겉으로는 고상함으로 치장하고 이제 세상을 다 산듯 체념하고 있지만, 보지 않고도 은교를 볼 수 있으며 만지지 않고도 은교를 느낄 수 있다. 노인을 사랑했던 제자 서지우는 멍청하리만큼 사람의 말을 잘 따르지만, 짐승의 날카로움과 야수의 욕망을 저변에 품고 있다. 그렇게 대조적인 세명의 캐릭터가 서로 각자의 시선에서 뱉어내는 고백은 스릴 넘치게 흥미롭다. 우리들의 시선에서 '은교'는 이해 받을 수 없지만, 노인의 시선에서 은교는 고결한 희생양이다. 서지우의 시선에서 노인은 이해받을 수 없지만, 은교의 시선에서 노인는 편안한 안식처이다.
그렇기에 노인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되어 은교의 허무한 불장난으로 끝나버린, 일종의 실망스러운 스토리는 소설 속의 '아름다운 감성'과 '캐릭터의 절묘한 대조'가 기특하게 커버해 주고 있다.
만약 소설이 사회적 윤리와 일상의 통념을 지지해줘야하는 고결한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소설 '은교'는 쓰레기이다.
그러나 일상의 틀을 넘어 부적절한 상상의 날개를 달고, 언어의 유희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 소설이라 주장한다면 '은교'는 '페이소스'이다.
이제 원작과는 다른 시선으로 자극적 메세지만 가득했던 영화 '은교'를 보며 실컷 실망하고 욕해줄 차례인가^^
때론 그런것도 재미있겠다. 책을 먼저 읽게 되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