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레프
알레프는
아랍 문자와 히브리 문자의 첫번째 글자이다. 이 글자의 발음을 읽을 줄 몰라서 황병하가 번역한 알레프인지
아니면 송병선이 번역한 알렙인지 더 가까운 발음을 알 수 없지만, 나는 좀 더 익숙한 알레프라 부르겠다. 이 글자가 어떻게 생긴지 궁금하다면 칸토어의 초한기수 기호를 떠올리면 혹은 찾아보면 될 것이다. 초한기수가 무한집합의 원소의 기수를 나타내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알레프는 무한을 상징하기도 한다.
2. 무한의 모티브: 인간의
불멸
알레프에서
가장 빈번하게 차용하는 모티브가 있다면 그것은 무한일 것이다. 먼저 ‘죽지
않는 사람들’에 나타나는 무한의 모티브인 인간의 불멸에 대해서 살펴보자. 죽지 않는 것. 이것은 인류가 오래도록 (역사상 거기에 가장 가까운 현대에서도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꿈꿔온
이상이다. 이처럼 인간은 생물학의 관점에서 필멸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어떨까? 현대의 인간은 언어를 통해 과거의 투탕카멘을 요청할 수 있다. 더 과격하게 바라보면 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는가? (멕베스) 이런 회의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필멸이라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부유하는 불멸의 그림자나 다름 없다. 루이스 보르헤스의 통찰은 바로 이런 유명론을 극한으로 활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무한의 모티브: 픽션의
불멸
‘아스테리온의
집’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스의 신화를 페러디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는 영웅 테세우스의 관점이 아닌 미궁에 갇혀 있는 미노타우르스의 관점으로 전개된다. 픽션의 운명은
언제나 주어져 있다. 제아무리 해석학의 시각에서 바라보더라도 어떤 사건은 종결되고 어떤 인물은 죽는다. 이것은 독자의 시선이 아니다. 이것은 픽션의 시선이다. 픽션은 고독하다. 픽션은 항상 독자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불멸의 생을
살아간다. 픽션 미노타우르스는 자신의 죽음을 꿈꾸며 독자 테세우스를 기다린다. 설사 픽션은 죽임을 당할지라도 새로운 테세우스가 나타나면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따름이다. 루이스 보르헤스가 생각하는 문학의 세계는 찰나멸과 윤회의 세계이다.
4. 무한의 모티브: 세계의
불멸
소설집의
제목과도 같은 ‘알레프’에 나오는 소재 알레프는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면서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빛나는 형상의 2~3센티미터의
물질이다. 혹자는 이것을 현대 물리학의 초끈 이론 속 다중 우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알레프가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낸 지식 체계라고 본다. 나는
알레프가 있던 집이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무너지면서 동시에 알레프가 사라졌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알레프는
소멸했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집이 무너지는 시점으로부터 소설의 다음 문장은 적힐 수 없다. 알레프의
소멸은 곧 세계의 소멸이기 때문이다. 알레프는 단지 ‘눈
앞에서 사라진 것’에 불과하다. 알레프는 물리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 한 권의 책이다. 유형의 책이 파괴된다고 해서 무형의 지식이 파괴될 수 없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어떤 사람은 인간의 지식 체계는 불완전한 체계인데 어떻게 그것이 알레프의 정의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냐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물으려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인간이 바라보고 인식하는 세계는 모두 언어의 표상과 추론으로부터의 세계이다. 세계를 넘어서고자 아무리 바벨탑을 밟고 하늘을 향해 올라가도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그 지점까지가 (인간의) 세계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만약
불멸에 대한 이해가 무한한 시간이 아닌 시간 자체의 소멸을 가리킨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세계는
불멸이다. 인생은 한계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길이다. (논리
철학 논고 6.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