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에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공간)에 대하여 생각하던 철학자이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와 같은 유명한 격언을 남긴 것도 바로 그이다. 엘레아학파에 의해서 두 철학자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여겨졌다. 이것을 해소하고자 시도했던 두 인물이 있으니 바로 헤겔과 하이데거이다. 이 중에서 하이데거에 대해 논해보자. 하이데거는 자신의 전기 철학의 대표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바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존재와 시간은 비록 미완성작(후에 다른 저서에서 부족한 부분을 이래저래 보충하긴 한다)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가장 심도있게 고민한 저서로 꼽힌다.
2.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는 한국 학계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철학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발간된 번역서나 연구서의 수만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쇼펜하우어만 보더라도 그의 대표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상당히 최근에 번역되었음을 볼 때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 하나로만 이런 현상의 원인을 환원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박찬국을 비롯한 뛰어난 하이데거 연구자들의 노고에서 비롯되는 부분을 축소 해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의 생각이든 그렇지 않겠냐만은 이런 좋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흔히 하이데거의 철학은 매우 어렵다고 간주된다. 번역어 자체가 한자로 만들어진 용어가 많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고민하지 않은 두 주제인 존재와 시간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박찬국의 이 강독이 없었더라면 하이데거에 대해서 영영 거리를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3. 존재
하이데거는 가장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인간 A은 자신의 존재 혹은 다른 사물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곤 한다. 특히 인간에게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안감(sorge)은 이런 물음을 가지도록 종용한다. 데카르트만 보더라도 확실한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았나? 하이데거는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는 세계-안에 있는-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존재를 나타내는 존재자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자 즉, 앞의 인간 A가 된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는 오직 인간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자들과 구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주어진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인 동시에 세계를 구현하는 존재자이다.
4. 시간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은 이런 존재 물음을 가지지 못한 채 자신의 존재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시간은 지금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자신이 나타내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에게 죽음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다. 때때로 우리는 외부적인 원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데 이것이 흔히 일컫는 자명하다고 믿었던 존재를 잃어버렸다(=실존한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병마를 비롯한 각종 인생의 무상을 경험하게 만드는 시련을 가리킨다. 박찬국은 하이데거가 해석하는 이런 현상에 대해 잘 서술한 소설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재를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은 어떤가? 그런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자기 자신이 밝히고 있기 때문에 생과 죽음을 포함한 삶의 모든 것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죽음마저 이미 선행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온 몸을 던지며 살아간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는 얼핏 현대 물리학에서의 시간 설명과 흡사해보인다. 물론 하이데거의 시간 이해에서 과거와 미래는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말하는 전적으로 인간적인(Personal) 시간 이해이다.
5. 죽어감, 태어남, 살아냄
하이데거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만큼 충분히 늙었다고 언급한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필립 로스가 말하는 노년은 대학살이라는 절망적인 한탄을 완전히 머릿 속에서 지워버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죽어감은 분명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이데거 역시 이를 부정하기 위해 앞의 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죽어감은 태어남은 하나이다. 생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으로 서로 함께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모두 품고 담담히 살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