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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섬님의 서재

사람들이 점점 더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일 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이제 온라인에서 읽고 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읽고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성찰과 자기 계발을 계속해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서구 세계에서 고대 그리스 시대 현인들과 고대 로마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어 이후 주교들과 성인들에 의해 발화와 고백이라는 관행으로 변형된 바로 그것 말이다. 특히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은 자아를 탐구하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 자아를 전시하며 자기계발 이야기를 고백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가톨릭 신자처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개신교 신자처럼 자기계발 공동체에 자신의 성공을 자랑한다. 그리고 에라스뮈스가 그랬듯 새로운 대중 매체와 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너 자신을 알라, 35)- P35
세계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일부는 죽음으로 내몬다. 정량화되고 데이터화되며 육체와 영혼이 발가벗겨져 전시되는 와중에 우리는 쉴새 없이 비교되고 분류되며 평가된다. 인문주의 ‘친구들‘은 경쟁자이자 적이 된다. 루소처럼 쉽게 피해망상에 빠지고 평가는 자기혐오로 끝이 난다. 이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경주로 우리는 언제나 패자다. 우리가 하는 고백은 분석되며 평가는 명확하고 항상 똑같다. 부족해. 우리는 늘 탐탁하지 않다.
그러는 사이 기업의 데이터 감시자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헤아린다. 만족할 줄 모르는 소비자(불교 교리에 따르면 절대적 공포)는 광고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표적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자기애의 형태로 자기 관리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데이터 경제에서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데이터를 생산하고 개인 맞춤화된 광고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런 맞춤형 광고는 사람들이 수천 명의 ‘친구들‘에게 공유한 마음속 비밀을 수집하고 그들의 취향을 앞다투어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내고 이미 부자인 최신 기술 및 미디어 기업 소유주들의 배를 더 불린다. 그러는 동안 이런 도착적 형태의 후기 기독교식 고백과 신인문주의식 커뮤니케이션은 괴로움에 찌든 육체와 정신이 마침내 포기를 선언할 때까지 끊임없이 실패하고 패배하는 피지배자를 생산해 낸다. 자기 계발 문화와 개인적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의 결합은 파괴적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설명한 대로 "성과 주체는 더 이상 유능할 수 없다."
그러나 신스토아주의나 후기 프로테스탄티즘, 신자유주의 문화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과는 반대로 실패가 우리 잘못인 것만은 아니다. 무언가를 개선하는 일이 개인의 책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강박적이고 영원히 불행한 자기 계발 실천가로 만드는 사회 문화적 환경, 즉 이 현대 사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너 자신을 알라, 39-40)- P39
하지만 자기 자신을 알고 발전시키려는 노력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이 노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루소가 지적한 대로 자기 몰두와 개인주의적 경쟁이 결합할 때다. (...) 루소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를 벗어난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돋보이려 애쓰는 사회에 있다. 루소와 뒤르켐은 나르시시즘 문제의 근원이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현대 사회에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역설적이게도 자기 몰두는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소셜 미디어로 인해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 즉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비치는 모습에 더욱 집착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이미지에 집착한다는 것은 더 이상 타인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진실한 관계(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자기애가 아닌)나 타인에 대한 공감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자아’를 연기하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불안해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낌다. 우리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매몰되어 있고, 네트워크는 나르시시즘을 부추긴다. 자기애는 물론 "너무 다치기 쉬워 끊임없는 지지가 필요한 인격"을 조장한다.
여기에 실제 사람들는 필요 없다. "상황에 맞는 맞춤 연기"면 충분하다. 실제 사람들은 거의 상대하지 않는다. (…) 너무 많이 노출되면 너무 많은 것이 드러난다. 너무 어색하고 이상하다. 타인은 문제, 즉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할 대상이다. 오늘날의 테크노컬처는 "나르시시스트의 방식대로 세상을 이해하기"를 장려한다. (특별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 43-46)- P43
이제 각종 소셜 미디어, 블로그, 비디오, 웹사이트 들이 자아를 규정하는 특별 과제를 수행하는 현장이 된다. 책을 쓰고 읽으면서 이루어졌던 무언의 대화와 느린 속도로 진행되던 인문주의식 자기 계발은 필사적으로 탄생하려는 요란하고 시끄러우며 신속한 자아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언제나 만들어지는 중이고 정기적으로 업데이트가 필요한 자아라 하겠다. 자아 성장을 도모할 시간이 없다.
자기 계발은 일종의 과제로서, 관리되고 평가되며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매일 매시간, 가능하다면 매 순간 자아를 연기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이 (그리고 자아가) 좌우되기라도 하는 듯이 이곳저곳을 클릭하고 둘러본다. (특별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 61-62)- P61
신자유주의 맥락에서 고유성을 위한 실존주의자들의 선택은 소비자로서의 선택으로 대체된다. 자아를 스스로 만들고 고유성을 지녀야 한다는 메시지는 광고와 마케팅을 통해 ‘고유한‘ 상품을 사야 한다는 요구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자기기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히피들과 실존주의자들의 사상은 본래 어떤 선의를 지니고 있었든 그 속에 어떤 가치를 담고 있었든 상관없이 상품화되고 악용된다. 1960년대 시인과 작가들의 사상은 돈으로 환산되고 사고팔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가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 역시 상품화된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나 물건, 상품으로 취급된다. 또 이런 자기계발 문화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도구가 된다. (특별한 나를 만들어야 한다, 63)-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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