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로 다시 읽는 자본주의 세계사
저자 이동민
갈매나무
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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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전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장경제 원리에 토대하며, 재화의 생산 및 교환을 통한 자본의 축적과 재축적이 지속해서 일어나는 경제 사조나 체제 또는 이와 관련된 문화 등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그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물론 유사 이래 인류에게 돈과 재화가 중요하지 않았던 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인류가 진기한 재화를 구하고 큰돈을 벌기 위해 무역을 시작했던 때는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와 함께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의 탄생은 15~16세기 오스만제국의 팽창과 이에 따른 실크로드 무역로의 봉쇄와 관계가 깊다. 자본을 투자해 더 큰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이니 무역은 당연히 자본주의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데, 무역로 봉쇄가 자본주의 발달로 이어졌다니 어찌 보면 크나큰 역설이다. 유럽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육로를 통하는 대륙 동쪽의 무역로가 오스만제국에 가로막히자 서쪽 대양으로 이어지는 신항로를 개척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에스파냐는 식민지 삼은 아메리카대륙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발굴된 덕분에 16세기 세계 해상무역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 기축통화의 시초라 할 만하다.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인물은 누구일까? 흔히 에스파냐에서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을 건너 1492년에 산살바도르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1000년 무렵 그린란드에서 대서양을 건너 캐나다 뉴펀들랜드에 상륙한 탐험가 레이프 에이릭손이다.
하지만 뉴펀들랜드에 뿌리내리지도, 대서양 횡단을 역사의 변화로 끌어내지도 못했던 에이릭손과 달리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은 인류 문명사의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에스파냐는 포르투갈과 다른 항로를 찾아야 했다. 그때 마침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항해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가 나타났고 이사벨 1세는 그를 후원하기로 한다.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허튼소리로 치부되었는데, 에스파냐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보니 '속는 셈 치고' 콜럼버스를 후원했다고 할 수 있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대륙에서 가져온 은으로 은화 ‘페소 데 오초Peso de Ocho’를 주조했고, 이 은화는 대항해시대 기축통화로 자리매김했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 은과 은화가 화폐로 중요하게 쓰이던 차에 아메리카대륙에서 고품질의 은이 어마어마할 정도로 생산되었고, 그것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무역선을 따라 전 세계에 유통되면서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화폐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은 덕분이었다.
네덜란드가 가장 적극적 · 공격적으로 청어잡이와 가공산업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청어 어획량과 청어 가공품 생산량은 유럽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그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된 네덜란드는 유럽 변방의 간척지에서 부강한 산업 중심지로 거듭난다. 훗날 해양 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조선술과 항해술에 관한 지식 역시 이때 축적되었다.
산업혁명은 산업생산성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면서 인류에게 전에 없는 물질적 풍요를 선사했다. 그뿐 아니라 규모의 경제와 시장을 실현해 본격적인 근현대 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가 태동할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산업자본주의는 이전의 상업자본주의와 달리 확실한 자본주의, 즉 ‘고전’자본주의로 분명한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니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류사의 대전환점인 동시에 온전한 자본주의를 가져온 자본주의의 대전환점이기도 하다.
프랑스대혁명이 남긴 성과는 민주주의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혁명에서 말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절대왕정과 특권층이 독점하던 자본과 경제의 자유와 평등도 함께 의미했다. 그 결과 상공업자들이 신분에 따른 불이익이나 사유재산 침탈에 시달리지 않으며 활동을 보장받을 길, 농민들이 귀족 지주들에 사실상 예속되다시피 한 소작농 신세에서 자영농으로 독립할 길이 열렸다.
제1차 세계대전과 두 차례의 혁명, 그리고 내전까지 겪은 소련의 경제는 큰 폭으로 후퇴했다. 경제체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식 계획경제로 노선을 지향했다. 서유럽과 달리 전제적 성격이 다분했던 황실과 강력한 특권을 누리는 귀족층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반쪽짜리’ 자본주의 혁명이 이루어졌던 러시아에서, 제대로 된 시민계급의 성장과 온전한 자유시장경제의 발달이라는 경험 없이 일어난 공산혁명의 결과였다.
1919년에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이탈리아 역시 독일처럼 수백 년 이상 분열을 이어오다 19세기 후반에 통일을 이룩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후발주자로 대두한 터였다. 이탈리아는 독일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영국 · 프랑스 등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유럽 제국주의 열강, 자본주의 선진국 간에도 존재했던 지리적 차별성은 상대적으로 후발 주자였고 오랫동안 분열을 이어온 탓에 통일과 부국강병에 대한 열망도 강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큰 손해까지 본 나라에 극단적 사상이 발흥할 밑거름을 뿌린 격이었다.
미시시피강, 미주리강, 오하이오강 등 대평원을 흐르는 유량이 풍부한 대하천은 농업용수 공급원은 물론 미국 각지를 잇는 교통로로 기능했다. 철도와 도로교통이 본격화하기 전에 이미 이들 하천은 새롭게 편입된 루이지애나를 기존 영토와 효과적으로 연결해 주었다. 또한 물자의 효율적인 운송이 가능해지면서 오대호 연안의 철강업과 석탄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훗날 미국이 병합할 서쪽 땅과의 지리적 연결고리까지 만들어 주었다. 아울러 루이지애나 식민지의 중심지였던 항구도시 뉴올리언스는 무역 발달에 큰 도움을 주며 미국이 자본주의 강국으로 대두할 잠재력을 더한층 증대시켰다.
중국은 오랫동안 근현대적 자본주의경제 체제와 거리를 두다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에서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신국제분업 체제로 편입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 세계의 지리적 질서가 변하던 흐름에 발맞춰 세계의 공장으로 거듭나는 동시에 공산당 일당독재가 금융과 기업마저 공고히 지배하는 중국 스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한 자본주의국가가 되어버렸다.
신국제분업의 글로벌 가치사슬 속에서 베트남은 세계의 공장 입지를 점하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하지만 저렴한 인건비에 치중한 경제성장은 신자유주의와 신국제분업이라는 불평등한 자본주의 경제질서 속에서 베트남 경제는 물론 사회와 자연환경의 지속가능성조차 위협하고 있다. 자본 축적과 기술 혁신이 부재한 가운데 저임금 노동력 위주로만 이루어진 경제성장에는 뚜렷한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들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베트남은 캄보디아 같은 주변 후진국에 발목 잡히며 ‘먹고살 수는 있는 나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
한국식 신자유주의를 오직 IMF의 산물이라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그 기저에는 ‘한강의 기적’이라 은유되는 1960~1980년대 초고속 압축 경제성장기에 대대적인 토목건설 사업이 행해지면서 태동한 토건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국토와 자연환경을 착취에 가깝게 이용하고 개발하는 토목건설 사업을 중심으로 국정과 경제정책이 이루어지는 경제체제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갉아먹는 여러 경제적 · 사회적 문제의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