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휴가 때 나는 "남도 답사 일번지"라 불리우는 전남 강진과 해남 땅을 돌아다녔다. 혼자 떠났던 답사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며 유독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풍경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다산이 유배되었을 때 머무르던 '다산초당'이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옛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가다 보면 가파른 비탈길은 어느덧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음습해진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면서 약 20여 분을 오르면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어둠침침한 다산의 유배지, 다산초당이 시야에 들어온다. 막판의 가파른 경사를 오르느라 숨이 턱 아래까지 차올라 있어도 다산초당이 시야로 들어오면 턱 하고 숨이 막혀 버린다.
유배된 사람이 머물렀던 집이라 하기엔 너무나 잘 지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무튼 나는 땀도 식힐 겸 넓다란 다산초당의 툇마루에 걸터 앉았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실제 조그만 초당이 있었으나 무너지는 바람에 폐가가 된 것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어놓은 것이라 한다. 그 뜻은 대견하나 이루어 놓은 방법이 사려깊지 못했구나, 란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반대로 옛 모습 그대로 번듯하지도 않고 지푸라기 몇 단을 엮어 얹은 지붕 그대로를 복원해 놓았다 해도 가슴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의미는 다르지만. 참고로 정다산이 묘사한 다산초당의 본래 모습은 이러했다 한다.(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에서 발췌)
무진년(1808) 봄에 다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축대를 쌓고 연못을 파기도 하고 꽃나무를 벌여 심고 물을 끌어다 폭포를 만들기도 했다. 동서로 두 암(庵)을 마련하고 장서 천여 권을 쌓아두고 저서로서 스스로 즐겼다. 다산은 만덕사의 서쪽에 위치한 곳인데 처사 윤단의 산정(山亭)이다. 석벽에 '정석(丁石)' 두 자를 새겼다.
아무튼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오래도록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손에 잡아보지 못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내가 툇마루에 앉아서 눈을 감았을 때 귓불을 훔치고 지나간 서늘한 기운은 비단 위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다산의 유배지에 올라 툇마루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을 때 내가 언뜻 들었던 것은 "천여 권의 장서"가 서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상치 못한 다산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기년아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산은 <기년아람>이 기대했던 수준에 못 미침을 말하고 이어서 그 책의 잘못된 부분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그런데 편지의 말미에 다산은 다른 말로 끝을 맺는다.
"<탐진악부>(다산이 유배되어 있는 동안 강진의 민요 등을 채집해 한시로 옮겨 놓은 시집의 이름)를 네가 이토록 칭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칭찬하는 법이 아니다."(46쪽)
글쎄 나는 편지의 이 마지막 두 줄에서 다산의 따뜻한 마음씨를 다 봐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웃고 또 웃었다. 내가 보기에 이 대목은 자신의 책을 칭찬한 아들 앞에서 좋아하는 마음을 차마 다 표현하지는 못하는-그렇다고 아주 감추지도 못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순수한 인간다움과 열정이 다산을 유배지의 고독한 생활 속에서 버티게 만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한 대목은 다산이 둘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술 마시는 법도에 대하여 설명할 때다.
"나는 아직까지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없고 나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 벼슬하기 전에 중희당(重熙堂)에서 세번 일등을 했던 덕택으로 소주를 옥필통(玉筆筒)에 가득 따라서 하사하시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시면서 혼잣말로 "나는 오늘 죽었구나"라고 했는데 그렇게 심하게 취하지 않고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맛난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學士)들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정신을 잃고 혹 남쪽을 향해 절을 하고 더러는 자리에 누워 뒹굴고 하였지만 나는 내가 읽을 책을 다 읽어 내 차례를 마칠 때까지 조금도 착오 없게 하였다. 다만 퇴근하였을 때 조금 취기가 있었을 뿐이다."(93쪽)
아마도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은 다산의 이 편지를 읽고 술 마시는 법도도 법도겠지만 아버지의 주담(酒談)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산이 자신의 주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잘 마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던 셈이다. 물론 잘 마시는 사람도 법도를 지키며 마시는 것이 올바른 자세라는 것이 편지의 요지이지만, 내 얼굴엔 왜 또 그 따스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는지...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다산이 홀로 외로이 살던 남도의 강진땅을 다시 찾아가고 싶어졌다. 올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초당의 툇마루에 기대 앉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으면 그때는 다산의 웃음소리도 바람에 묻혀 들려오겠지,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