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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대녕이 어디로 가든 나는 아무 말 않기로 했다. 지난 수년 간 그가 보여준 글쓰기의 행보와는 관련 없이 이번 신작을 읽고 난 뒤의 간략한 느낌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건 무책임한 삿대질, 혹은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호랑이가 바다로 갔다고? 바다로 간 것은 정작 그 자신이었음을...

내 느낌은 늘 그랬다. 윤대녕 소설이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때는 「은항아리 안에서」나 「상춘곡」이 실려 있는 단편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가 나왔을 즈음이었다. 윤대녕의 (단편)소설이 정점에 도달한 그때. 그때는 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치며 지나갔고 나는 가끔씩 어둔 불빛에 의지해 그의 소설을 필사해 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뿐인가, 술에 취한 날이면 나는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초점 없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깊은 물 속을 헤엄치듯 휘저어 나가기도 했다. 윤대녕은 아팠고, 아름다웠고, 나는 한없이 멍청이가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만남이 순간 필연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 시작을 알 수 없던 존재의 잃어버린 시원. 그 상류를 찾아 올라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같은 주제가 수없이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처럼 변주되고 있다 해도 나는 그것이 도무지 싫지가 않았다. 그러나 윤대녕의 소설을 두고 누군가가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고 말했을 때, 무심코 동의를 해 버린 것은 당시의 나 자신도 까닭 모를 우울과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작품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다. 자기 존재에의 함몰과 필연으로의 귀결을 상정해 둔 지리멸렬한 자기 연민. 그의 소설에서 유독 몇몇 이미지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정설처럼 인정(해석)되고 있는 그의 詩적인 문장 때문만이 아니라 주인공의 넘치는 자의식과 세계에 대한 독단적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비껴 생각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들 자신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세계로부터 일정 정도 간격을 둔 채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 남기 위한 방법이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아파 보였고 애써 그들을 외면하려 했다.

아침 저녁으로 지하철에서 시달리면서도 나는 이 소설을 힘겹게 읽어내려갔다. 소설 한 편을 다 읽는 데 일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비된 것은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소음과 참기 힘든 피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소설은 늘 그래왔듯 힘겨웠다. 단숨에 해치울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윤대녕의 이번 신작 장편이 출간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새 소설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었다. 이를테면 시간성과 관련이 있는, 그러니까 시대를 외면하지 않는 글쓰기에 다가가려 했다는 등의 어찌보면 시시콜콜한 입소문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윤대녕은 이전보다 더 깊이 자기 안으로 침잠하려 하고 있었으며 내 자신에게 화가 날 정도로 깊은 고독은 배려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가령 이런 풍경이었다. 나는 출근길의 지하철 안에서 영빈과 해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힘겹게 읽어내려간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나는 내려야 할 역에서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은 채 책을 들고 내린다. 계단을 올라 바깥으로 나왔는데 하늘이 불현 곧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다. 나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우울에 사로잡힌다. 바람은 불고 나는 이제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다. 내 감정을 이따위로 만들어 놓은 그가 원망스럽다. 몇 걸음을 걷다 나는 우연히 한 젊은 문학 평론가를 만나 횡단보도 앞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눈다. "도대체가 윤대녕은 변한 게 없더군요. 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독에 몸부림치는지 모르겠어요. 계단을 지나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우울해져서 숨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랬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다. 영빈은 왜 그토록 고독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걸 숨기려 하지 않는가. 고독한 존재는 타인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나는 영빈에게 비꼬듯 말해주고 싶었다. "왜? 그렇게도 고독하다면 누군가에게 가서 차라리 널 죽여달라고 그러지 그래?" 그러나 그건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아니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그렇게 쏘아 붙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그토록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데, 얼마나 피해 다녔는데... 영빈은, 아니 윤대녕은(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윤대녕의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독 허구가 아니라 작가 그 자신인 듯 느껴진다) 그걸 대놓고 다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누가 감히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랑을 멈춘 지 이미 오랩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저지르고 싶지도 않고요.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131쪽)

나는 벌거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부끄러움보다는 내가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을 그는 다 까발려 놓고 얘길 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영빈 씨한테는 고독이 늘 그렇게 사나운 짐승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나요?"
"고독? 그래, 그것도 고독의 일종이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고독은 흐린 거울이 걸려 있는 어두운 카페 한구석에 앉아 밤늦도록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애꿎은 담배를 죽이고 있는 중년 신사의 모습같은 거야. 호랑이하고는 좀 다르지." (27~28쪽)

그가 그렇게 얘기해도 상관 없었다. 내게는 그가 소설 내내 호랑이처럼 울부짖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굳이 지나간 시대의 아픔과 가정사의 불운함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윤대녕에게 존재는 늘상 고독과 아픔에 시달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태초에 받았던 상처가 여전히 기억 속 어딘가에 살아서 호랑이처럼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준 걸까요?"
"상처는 스스로 받는 거야." (82쪽)

나는 여전히 안타깝고,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지만 끝까지 그를 미워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픔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아버지를 찾아가는 영빈처럼 말이다. 책장을 덮으면서 나는 부모님 몰래 못된 짓을 한 아이처럼 냉큼 책장 한 구석에 이 책을 꽂아 버렸다. 이제는 그가 더 달라진 소설을 쓴다 해도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어설프게나마 읽어 낸 이러한 주제 밖의 다른 것들까지 건드려 문학 외적으로 그가 지탄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내 작은 바람이다. 이제는 육지로 돌아와 글을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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