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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2005)에 나타난 김연수 글쓰기의 다양한 형식이나 문헌 자료를 통한 (표현의 방식에 있어서의)현학적 취향에 대해 느낀 매력은 그의 초기작에 대한 궁금증으로 곧장 이어졌다. <7번 국도>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약 10년 정도의 간격을 가진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김연수의 소설이 지니는 시간적 진폭이랄까, 그러한 연결성(또는 단절성)을 찾아내고 단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심산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그간의 다양한 시도(작품)들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니까.

어쨌든 <7번 국도>는 지금의 김연수와 약간은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도감있게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이다. 이것은 문체의 경제성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형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간적 순서나 인과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주인공의 파편화된 기억들이 부분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이 독특한 형식은 각각의 짧은 사건들을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로서, 또는 커다란 그림을 이루는 개별적인 퍼즐조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그밖에 김연수는 다른 문학 텍스트와 문화적 코드들을 끌어들여 와 중간중간에 삽입하고 있는데, 일단 이성복의 <그 해 여름>이란 시를 소설에 맞게 변형시켜 인용해 놓은 첫 부분은 <7번 국도>가 낭만과 여행이라는 환상으로 다독거려진 달콤쫍쪼름한 소설이 아니라는 불길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뿐이랴, 읽다가 밑줄을 쳐 놓은 부분이 장정일의 <강정 간다>란 시의 첫행에서 단어 하나만 바꿔 놓은 것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는 원작과 패러디를 제대로 구분해 내지 못한 자신을 탓해야만 했으니.

<7번 국도>는 네 남녀의 사랑과 그로 인한 상처를 7번 국도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는 우리가 지난 90년대 소설에서 보아 왔던 바와 같이 상처와 응시(또는 치유)라는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의 친구 재현은 서연과의 이별에서 비롯된 상처를 난폭한 자기 파괴라는 방법으로 일삼다가 주인공이 먼저 꼬신(?) 여자인 세희로부터 그 치유의 방법을 얻어나가려 한다. 그러나 세희 역시 기억 속에 정체되어 있는 상처를 가진 여자였고 결국 주인공과 재현은 7번국도를 자전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만의 치유 방법을 깨달아 나가게 된다. 상처가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그리고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들의 '자전거로 7번국도 거슬러올라가기'란 궁극적으로 정체된 기억,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는 방해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으리라. 결국 세희는 일본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하고, 주인공은 (뒈져버린 7번국도라고 불리는)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기로 결심했으며, 재현은 다시 밴드를 결성한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린 때문일까. 연인과 함께 양철 지붕 처마 아래 나란히 서서 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삶에 대한 애착과 진정성이 어쩐지 지금의 세태와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만 같아 아쉽다. 90년대 일군의 소설들이 앞선 시대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뼈아픈 절망감, 그리고 허무라는 관념의 질척임을 연인과의 사랑과 상처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치환시켜 나타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7번 국도> 역시 그와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괴변일까. 어쨌든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김연수가 본격적인 다음 세대의 새로운(그러나 생에 대한 진정성을 담보한) 글쓰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작된 모호한 소설인 것 같다.

정체된 무언가로부터 탈피하는 것은 곧 기억 속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7번 국도>의 주인공들이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갖게 됨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시대(물론 그것은 지금이 돼버렸다)를 준비하기하기 위한 또 한 번의 자기갱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의 진정성과 일관성 속에서 구축되는 형식의 다채로움이야말로 김연수의 글쓰기를 계속해서 지켜보게 만드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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