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선풍기를 고정시켜 놓고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창비, 2007)를 읽었다. 문단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놀랍다거나 흥미진진하다거나 새롭다는 느낌이 그다지 들지 않았다는 것이 첫 느낌이다. 확실히 <바리데기>는 '거장의 역작'이라 불리기엔 뭔가 부족한 듯하다. 기법상의 측면에서 보자면 <손님>에서 지노귀굿의 형식을 차용한 것보다 덜 효과적이다. <바리데기>는 무속 신앙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서사무가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의 구조를 따왔다고는 하나 이것이 실험적인 측면에서 얼마나 각광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생긴다.
주인공 바리가 영혼을 보고 대화할 줄도 알며, 다른 사람의 몸에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그의 과거 일들을 낱낱이 알게 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를 평범하게, 심하게 말하자면 단조롭고 지루하게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바리가 겪게 되는 고난은 인물들 사이의 갈등에 의해서라기보단 외적 환경, 그 사회 내부에 있음으로써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데서 비롯된다. 북한에서의 가뭄과 산불, 탈북, 중국에서 영국으로 밀입국하게 된 계기, 영국에서 얻은 남편 알리와의 헤어짐 등등의 큰 사건들 속에서 바리는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고 따라서 자연스레 수동적인 인물이 된다. 외부의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직접 맞설 수 없는 바리는 영험한 능력과 꿈속 이야기를 통해 자기 나름의 어떤 길을 따라 갈 뿐이다. 이는 소설의 긴장과 갈등을 한풀 꺾어 버리는 역할을 '톡톡이' 해낸다.
그 영험함이란 우리 삶에서도 때론 독이 된다. 20살도 안 된 여자 아이가 자기보다 훨씬 나이도 많고 우직한 나무처럼 보이는 남자의 청혼을 받고도 세상 만사 다 아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얼마나 까칠할까? 남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그들과 교감하는 데 도움은 될지언정 치고박고 울고웃으며 쌓이는 감정따윈 기대할 수 없다. 극적인 전개도 없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휘말려 '흘러갈' 뿐이다. 바리는, 그래서 꿈속에서만 험난한 바다를 건너고 무서운 군졸들과 맞대면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과거며 현재를 다 알고 있는데 갈등 겪을 일이 뭐가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바리가 찾으려는(찾아야 하는) '생명수'란 무엇인가에 초점이 모아진다. 내가 이해한 생명의 물은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분쟁, 전쟁과 학살, 기아와 환경 파괴 등의 원인인 인간의 분노와 이기심, 미워하는 마음 등을 해소시켜줄 무엇, 바로 화해와 용서이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누구 말을 빌려서 하는지 나는 저절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변하며 공수가 터진다.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282쪽)
그런데 바리가 생명의 물을 찾는 험난한 과정은 딸아이를 잃고 앓아 누운 며칠 간의 꿈속에서만 나타난 것으로 서술될 뿐이다. 바리의 험난한 삶이 세계의 부조리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해결의 방법이 고작 한갓진 꿈속에서 외치는 용서와 화해라면 너무 허탈하지 않은가. 언제부터 황석영이 이런 범우주적인 세계관을 갖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내겐 마치 저기 여의도에서 놀고먹는 치들이나 내세우는 '화합'처럼 들려왔으니 말이다.
기대에 훨씬 못 미쳤지만 초반부의 몰입도는 명불허전이란 말을 실감케 했다. 이래도 되나, 란 심정이 되어가면서 작품을 읽어가는 속도가 줄긴 했지만 북쪽 사투리를 사용하는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나 상황을 설정하는 디테일의 힘은 여전했다. 어쨌거나 소설만큼이나 허탈한 주말을 보내며, 몇 시간만 자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는 나도 대책없이 흘러가는 저 시계 초침을 '용서'해보록 노력해봐야겠다.
(용서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