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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처음 나를 끌어당겼던 매력은 단지 '프랑스적'이라 할 때의 '적'이란 표현 때문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몇몇 나라들의 '-적'인 풍경을 동경해왔었고 그러한 삶이란 과연 어떤 풍경들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집어들기 전까지(그리고 차례를 볼 때까지도) 나는 이것이 소설이란 장르에 속하는 책인지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이 '프랑스적'인 삶이란 퐁네프 다리에서 키스를 할 수 있는 연애라든가, 독신자 예술가들의 지독히도 외롭고 낭만적인 우울과 열정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일종의 깃털 같은 에세이여야만 한다고 미리 확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은 내 기대를 완벽하게 저버린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적인 삶>은 폴 블릭이라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가족들에 관한 한 편의 이야기다. 그것도 블릭의 유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아주 긴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형의 죽음, 성에 눈 뜸, 몇 번의 연애, 결혼, 외도, 자녀의 탄생, 성공, 부모의 죽음. 한 인간(또는 거의 모든 인간)이 겪는 삶의 모든 사건과 감정이 녹아들어 있다.

프랑스의 정치가들이 어떠한 평가를 받아왔으며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얽혀 있는지 잘 몰랐지만 블릭과 그의 가족들의 생각들로부터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처음 끌렸던 '프랑스적'이란 표현보다는 그저 '삶'이란 말이 이 소설에 더 어울린단 생각이 든다.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주인공의 어머니인 클레르 블릭의 마지막 나날과 어머니의 죽음 뒤에 느끼는 여러 감상들은 나의 가슴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어머니라는 한 존재의 죽음에 이르러 블릭과 나의 머릿속에는 앞에서 읽어온, 그리고 그가 겪어온 삶의 파편들이 한순간에 하나의 커다란 화폭에 그려진 그림으로 끼워맞춰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다시 산산조각나버린다.

'프랑스적'인 삶이라고 해서 그 밖의 다른 존재들의 '삶'과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건 단지 내가 가지고 있는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블릭이 지나간 삶에 대해 후회하거나 뭔갈 되돌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은 '프랑스적'이라기보단 그 자신의 성향인 탓이 큰 것 같다. 블릭은 단지 그때마다 주어진 자신의 삶과 자기를 둘러싼 '가족'이란 존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해야 할 일을 찾아낼 뿐이다. 이걸 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열정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그 어떤 냉정함도, 그 어떤 열정도 없으며 흘러가는 것은 다만 삶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연애와 은밀한 비밀들, 그리고 천천히 사그라드는 존재를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을 몇 자 옮긴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클레르 블릭과 폴이 함께 있던 장면이다.

"이걸 이해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와서도 내가 늙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거의 팔도, 다리도, 심장도, 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모든 것을 발견하고 인생을 향해 바쁘게 달려가는 열여덟 살의 나를 본단다. 이처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서 죽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네 형과 아버지, 안나는 너무나 일찍 떠났다."
그때 무엇인가가 어머니 눈 앞으로 지나갔다. 어떤 그림자가, 어떤 생각이, 어떤 고통의 가는 선들이.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이 변했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서 몸을 돌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무섭단다. 알겠니? 너무나 무서워."(363~364)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내 딸을 두 팔로 안았다. 죽은 나무를 얼싸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는 세상 꼭대기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허무의 끝에 서 있었다.
내 가족 모두를 생각했다. 그 의혹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 그들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놀라지도 않았다.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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