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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의 소설을 읽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경로가 있었다.

가끔씩 들르는 어느 작가의 홈페이지가 있는데 어느날인가 게시판에 "<현대문학> 9월호에 박형서의 소설이 실렸는데 근래에 읽어본 소설 중에서 가장 재밌게 읽은 소설"이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 소설은 이 단편집 안에도 실려 있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달걀을 중심으로>란 소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난 한겨레에 실린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관심은 증폭되고 기대는 가을하늘 끝까지 가 닿았다. 그런데 <현대문학>9월호는 그때 이미 품절 상태였다(때는 9월 말에서 10월 초였는데...). 헌책방에 갈 시간을 내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정말 읽고 싶어서,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 단편이 함께 묶인 소설집이 나왔단다. 아무튼 그랬다. 소설은 충격적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박형서가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선 알았냐고? 모르겠다. 그런데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을 쓴 사람인 건 분명해졌다. 나는 출퇴근하는 길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이 리뷰를 만약에라도 누군가 읽게 된다면 왠만해선 공중장소에선 읽지 않기를 권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너무너무 웃겨서'('너무' 한 번으론 부족하니 한번 더 쓰겠다) 하마터면 지하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그건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크게 웃고 싶은데 주변의 눈초리를 의식하느라 그러질 못하고 참다 보니 나중엔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힘들었다. 웃음을 참는 것도 큰 고통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가끔씩 멍하니 차 안에 있을 때 그놈의 "가금류의 뇌를 가진" 데다 "흑사병 수준"의 문장을 구사하는 비평가의 이미지나 "붕산칼슘처럼 생긴 문학평론가"(<'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오리랑 오리너구리도 구분 못" 하는 당직 장교가 당황해서 하는 말 - "인디언이라면..." .... "시베리아 북동부의 초원 지대에 오순도순 화목하게 살다가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로 삶의 터전인 초원 지대가 황폐해지자 지금으로부터 약 삼만 년 전에 북미대륙으로 이동하여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머리에 깃털을 꽂고 야호야호 신나게 사냥과 수렵을 하던 몽골로이드 계통의 그 아메리카 인디언이란 말씀입니까?" - 이나 뒤통수를 겨냥하고 있는 권총에 잔뜩 쫄아선 "백 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두유전쟁>) 하고 운전병같이 말하는 새신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곤 한다.

읽고 또 읽어보고 떠올리고 또 떠올릴수록 '그놈 진짜 골때리네'란 생각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꼴에 이 소설집을 다 읽고 나선 작가의 의도나 알레고리를 짚어내려고도 했는데 그것조차도 무의미한 짓인 듯싶다. 그렇게 하기엔 내가 출퇴근길의 지하철과 만원버스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참아냈던 눈물들이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웃기다. 그냥 웃긴 게 아니라 "골때리게" 웃긴다. 그런데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모아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자신을 투신하는 아이(<물속의 아이>)의 사악하고 비열한 표정이 내 얼굴에도 투영되는 듯한 이 느낌은 도대체 무얼까. 그게 좀 궁금하긴 하다. 이기호의 "순덕 씨"가 주었던 안타까운 웃음과도 또다른 무엇이 박형서에겐 존재한다. 아무튼 그렇다는 얘기다.

(+) 초판 143페이지 아래 달려 있는 '각주 10번'이 잘려나간 듯한데 이걸 어째야 하나? 149페이지 맨 위 한줄이 떨어져 있는 건 그렇다 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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