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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끼고 퇴근했을 때 나의 어머니는 지독한 감기로 밥 한술 제대로 못 떠드시고 자리에 누워 계셨다. 어머니는 누우신 채로, 들어온 나를 향해 감기가 다 나으면 김치라도 몇 포기 담가 먹자고 하셨다. 방으로 들어와 가방만 내려놓고 남은 몇 페이지를 마저 읽었다. "나는 이렇듯 매양 속절없이 살아왔답니다, 어머니." 그의 사무치는 고백을 조용히 소리 내어 세번 쯤 읽고 책장을 덮었다. 안방에서 간헐적으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뒤 어머니는 그 전의 몸상태를 어느 정도 회복하셨고 어느 날인가 퇴근을 해보니 식탁 위에는 정말로 갓김치와 깍두기가 올라와 있었다. 어머니는 감기에서 다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 나는 다시금 책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수저>.

이따금 어떤 기대는 적잖은 실망이나 안타까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그건 일상에서 자주, 잘 일어나므로 그닥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아니다. 윤대녕의 '맛' 산문집의 처음 어떤 부분들은 내가 가졌던 기대와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산문집이 '음식'이 아닌 '맛'에 관한 것이니만큼 정보보다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음식이나 맛이나 뭐가 그리 다를 게 있겠냐마는 아무래도 시시콜콜하고 식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음식기행'류가 아닌 한 그 정도 기대는 해도 되지 않을까. 게다가 이 책이 어머니 앞에 차려드리는 소박한 밥상이라면 굳이 각각의 음식들이 가지고 있는 유래나 역사를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 약간의 불만스러움을 가지고 읽는데 문득 윤대녕의 다른 글에서 묘사되었던 정갈하고도 맛깔스럽던 음식들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기억해낸 것은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에서 '스물세 개의 계단으로 오는 가을' 편에 등장했던 된장찌개 먹는 장면, 그리고 단편 <은항아리 안에서>에 등장했던 여인이 찌개를 끓이던 장면 등이었다. 그러고 보니 윤대녕의 이야기에는 음식과 연애가 서로 뒤엉켜 있는 연인의 관능적인 이미지처럼 자주 등장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도 당연히 연애에 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갈치빛에 반한 처녀와 처녀의 깨금발에 반한 총각의 이야기는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어떤 이가 차려주던 밥상의 맛을 기억하는 것은 그 언젠가 나를 스치고 지나갔던 여인을 그리워함이고, 추운 겨울 뜨끈한 온돌마루에 당신과 함께 마주앉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쌀밥을 뜨는 것은 나의 속절없던 시절에 대한 여인의 푸근한 위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밥을 함께 먹자는 말은 곧 나와 연애합시다,란 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는... 그럼 윤대녕이 어머니에게 내미는 밥상은? 이 땅의 모든 아들에게 영원한 여인은 어머니라고만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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