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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ang님의 서재
  •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 13,500원 (10%750)
  • 2013-03-25
  • : 3,047

루이자 메이 올콧이 1868년 미국에서 『작은 아씨들』을 선보인 후 약 100년이 지나 이곳에서 박경리가 『김약국의 딸들』을 발표했다. 전자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된 어머니와 네 딸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조선 말기부터 1910년 한일병탄 이후의 경남 통영을 배경으로 한 김봉제 가문의 이야기이다. 딸들을 내세운 동서양의 두 작품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겸 같이 읽었는데 전자가 엄격한 청교도적 가치를 시종일관 유쾌발랄한 분위기에서 전하는 반면, 후자는 저주받은 가문의 이야기를 시종일관 침울하고 비통한 분위기에서 전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 가장의 역할을 한 점과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재능 있던 둘째(용빈과 조)가 되려 딸들 중에 가장 늦게 제 짝을 만나거나 못 만난 점은 공교롭게도 같다.  




김약국의 딸들은 무려 3대에 걸친 김봉제 가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영미권에는 '김 씨 딸들의 저주 (The Curse of Kim's Daughters)'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는데, 봉제-봉룡 형제에게서 시작해 (봉룡의 아들) 성수와 그의 딸들에게로 이어지는 가문의 저주는 비극적인 한국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층 침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의 제목인 '김약국'은 김봉룡의 아들, 김성수를 가리킨다. 그의 어머니 숙정은 송 씨 아들 욱과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사주가 안 좋다며 혼인이 삐그러지면서 오만불손한 봉룡에게 시집가 끝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까지 잃은 성수는 백부 봉제와 백모 송씨의 집에서 눈칫밥을 얻어먹다 약국을 물려받고 한실댁과 결혼한다. 둘은 딸 다섯을 낳아 어장을 운영하며 부족함 없이 잘 살아가지만 곧 김약국의 집안에 연이어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다.





모파상의『여자의 일생』에서 주인공 잔느가 그랬다. 운명이 일생 자신을 악착같이 괴롭혔다고. 『김약국의 딸들』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도 운명의 악착같은 괴롭힘을 피하지 못한다. 일찍 과부가 된 큰딸 용숙은 유부남 의사의 아이를 낳아 제 손으로 죽이고, 든든한 아들 노릇을 하던 똘똘한 둘째 용빈은 연인에게 버림받고, 얼굴이 고운 말괄량이 셋째 용란은 머슴과 사귀다 아편쟁이 연학에게 시집가 맞고 살고, 넷째 용옥은 언니 용란을 흠모하던 기두의 아내가 돼 비극적 죽음을 면치 못하고, 막내둥이 용혜는 용빈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공부하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돼 고향으로 돌아온다. 특히 어머니 한실댁을 빼닮아 늘 지나치게 순종적이던 용옥이 유독 어머니와 함께 가장 허탈한 죽음을 맞는 건 주목할 만하다.  





인상적인 캐릭터는 한실댁과 셋째 용란이다. 한실댁은 남편에게 절대 순종하고, 자녀 특히 딸에게는 엄격한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 고생과 박복의 아이콘이다. 자손 귀한 집에 시집와 첫아들을 먼저 보낸 후 연달아 딸만 낳아 평생 가슴에 철천지한을 품고 살고, 팔자 사나운 딸들 때문에 인병까지 얻었기에 부디 저승길이라도 편하기를 바랐건만 한밤중에 비명횡사해 어느 인물보다 탄식을 자아낸다.


 


특히, 셋째 용란은 "한국판 마담 보바리"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딸 다섯 중에 얼굴이 제일 고와 부잣집에 시집갈 줄 알았더니 하필 집에서 부리는 하인과 연애를 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처녀가 밤마다 서방질한다고 온 동네 소문난 탓에 용란은 아편에 중독된 성불구자에게 시집가 인생이 꼬여버린다. 용란만 따로 떼어내도 충분히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인생길은 험하다. 신분을 뛰어넘은 한돌과의 사랑, 아편에 중독된 남편에게 당하는 폭력, 자신을 남몰래 흠모해온 기두의 애정과 애증의 줄타기까지 용란의 인생길은 온통 가파르기만 하다. 




홍섭이 떠난 후 비탄에 잠긴 용빈에게 선교사 케이트가 그랬다. "인생이란 사철이 봄일 수는 없잖아?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한겨울이 오면 헐벗고 떨어야 하지만, 이내 봄이 오지 않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 돼요."라고. 용빈은 희망을 잃은 게 아니라 누군가 자기의 희망을 앗아갔다며 남은 거라곤 절망뿐이라 했다. 친일파이자 고리대금업을 하던 정국주 같은 인물을 빼면 용빈을 포함한 거의 모든 등장 인물에게 눈곱만큼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살을 에일 만큼 찬 바람이 분다고 마냥 체념하고 있기에는 저 어느 길목에서 코가 빨개진 채 기다리는 봄의 햇살이 너무 유혹적이다. 설령 김약국의 집안에 운명의 저주가 있었다 쳐도, 용빈과 용혜라면 그 지긋지긋한 끈을 끊어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부디 믿음을 잃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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