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여전함에 관하여 『더 어두운 걸 좋아하십니까』 by 스티븐 킹
읽은 날 : 2026.5.14.
나는 전작주의자에 가깝다. 전작주의자라고 단정짓기 보다 그에 ‘가깝다’ 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실제로 내가 읽기 시작한 모든 작가의 작품을 전작하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몇몇 작가의 작품은 완벽하게 전작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한번 전작하려 마음먹은 작가에 대해서는 어느 작품에서 실망을 하더라도 버리는 일이 없다. 사실 실망이라고 해도 기대치 자체가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작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이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취향은 변할 수 있어도 작가의 스타일이 변하기는 어렵다. 한 작가의 작품 안에서 수준별 편차가 있을 수는 있으나 내가 처음 그 작가를 좋아하게 된 이유(그 작가 특유의 스타일)는 변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런 내가, 얼마전 어느 작가의 전작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이전에 모아둔 그 작가의 책을 모두 처분한다거나 하는 일은 영영 없을거지만, 앞으로 그 작가의 신작을 읽는 일 또한 없을 것 같다. 이유를 묻는다면, 아아, 늙음은 슬픈 것이구나, 라고 답할 밖에. (어느 작가인지 묻지 마시라. 당신이 예상하는 그 작가 맞을 거다. 근데 우리, 입밖에 내어 이야기하지 말자.)
소설가는 뜻밖에, 조로(早老)하는 존재, 아니, 소설가라는 직업은 뜻밖에 은퇴가 이른 직업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 늙음을 이겨내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흔하지 않기에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스티븐 킹이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왜 작가와 함께 나이 먹어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사실 하루키의 주인공들도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기는 하다. 최근작의 주인공은 40대였다.) 그 영원한 젊음이 감탄스럽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루키가 써 내는 노년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질 때도 있다.(그게 좋을 거라는 보장은 못하겠다마는) 그 생각을 하던 중에 이 단편집을 읽었다.
바로 전작 『페어리 테일』의 주인공은 10대 후반의 소년이었기에, 이 단편집이 뜻밖이었다. 뜻밖이었을 뿐, 싫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이라는 그 고색창연한 경구가 이렇게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경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1947년에 태어나 올해 만 77세가 된 이 할아버지의 소설은 《캐리》를 발표하던 26살의 그때와 동일하게 펄떡펄떡 싱싱하다. 주인공이 75세가 되어있어도 말이다. 75세의 주인공이 75세가 겪을 수 있는 노인병(고관절 관절염!)을 앓고 있는 이야기(<방울뱀>)는 그 초자연적인 공포(스티븐 킹이 가장 많이, 잘 다루는)를 이야기 하면서 동시에 상실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75세의 필은 얼마전 두 번째 결혼한 아내 다나와 사별했다.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아내는 한명 뿐이었고, 다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태드가 너무나 불행한 사고로 4-5살 무렵 죽은 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지만 미워서 미운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p.200) 헤어졌다. 그리고 몇십년의 세월을 지나 재회했고, 재결합 해 10년의 세월을 함께 살았다.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인 필과 죽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벨 부인의 차이는 뭘까.
다나와 필 부부는 아이의 죽음에서 오는 공허함과 분노를 서로에게 투사할 수 있었다. 벨 부인은 그토록 비참하게 쌍둥이를 잃었지만, 남편 역시 닷새 뒤 심장마비로 별세한 탓에 그 분노를 소화해 낼 방법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끝내 놓지 못한 것이다. “잊어버리는 건 안되는 일이지만, 너무 꼭 붙잡고 있으면…… 그러면 괴물이 탄생된다”(p.207)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아니, 몰랐던 게 아니지만 놓을 방법도 놓을 기회도 없었던 거다. 그래서 무섭다기보다는 슬펐다, 이 이야기가.
70대 후반이라는 나이는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되는 나이일 것이다. 부모님과 이별하고, 친구와 이별하고, 때로는 자녀와의 이별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젊음과도 이별하겠지만 또한 나의 늙음과 조우하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고,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되는 나이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스티븐 킹은 여전히 아내 태비사 킹과 해로하고 있으며, 세명의 자녀 역시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사람이, 모든 일을 겪어야만 아는 것은 아니니까.
작가 후기가 재미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이야기가 알맞은 도화선을 만나 온전한 형태로 떠오르는 것인데, 아주 끝내주는 경험이다. 세세한 부분이나 이야기의 결말까지 아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창작이 주는 즐거움의 일부다. 이런 방식이 어떤 이유에서 또는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나도 전혀 알 수가 없다.”(하권, p.344)
스티븐 킹의 왕성한 작품활동과 그 고르게 높은 작품 수준에 많은 사람들이 창작의 비법을 물었고, 스티븐 킹의 답은 너무도 유명하다. “창작의 뮤즈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언제 오면 되는지 알려 주라.”는. 그는 매우 성실하게 글을 쓰는 작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작가 후기는 이번 단편집의 첫 번째 단편 <재주 많은 두 녀석>과 연결된다.
유명작가 루스 크로퍼드의 아들 시점에서 쓴 이 단편에서, 작가는 이 뛰어난 작가의 창작 비법에 대해 슬쩍 흘리는 척을 한다. 그건 뜻밖에도 우주에서 날아온 특혜였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비법을 알려주는 척하며 마지막엔 묵직한 한방을 날린다.
“없는 걸 줄 수 있는 건 없어요.”(상권, p.93 <재주 많은 두 녀석>)
그러니까 엄청난 외부의 도움이 있더라도(그야말로 창작의 뮤즈가 네 옆에 붙어서 항상 노래를 불러주더라도) 기본적으로 네가 최소한의 재능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아픈 깨달음을 주는 소설이다. 있는 걸 크게 키울 수는 있지만 아예 없는 걸 만들 방법은 없으니까.
소설의 화자는, 대부분의 소설가 지망생들이 그러하듯 체념한다.
“가질 수 없는 걸 원하는 게 잘못은 아니다. 그걸 감수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 된다.” 고.
하하, 이 장난꾸러기 할배. 다음 작품도 기대하고 있어요!!! 오래오래 장수하세요!!!
2026.5.14.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