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 책』by 곽아람 & 『안녕, 나의 순-정』by 이영희
읽은 날 : 2025.7.26.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겠지만, 아이를 핑계 삼아 어른의 욕심을 채우는 것들이 있다. 어린날의 결핍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집에서는 디즈니 베이비돌 시리즈가 그렇고(나는 베이비돌 시리즈를 전부 다! 사이즈 별로 다! 가지고 있다. 하하하, 진지하게 말하건대, 자랑이다. 반어 아님 주의.) 시공주니어의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가 그렇고, 창비 아동문고 시리즈와 시공주니어 문고본 시리즈가 그러하다. 모두가 완역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다. 둘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날이 멀지않은 지금도, 이 책들은 아이방 책장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고, 얼마전 책장정비를 한참 하던 시기에도 이들을 위한 자리를 지켰다. 처음 살 때는 애 핑계를 대고 산 책들이라 둘째방 책장에 넣었지만 애는 읽지 않는다.(아니 왜 안읽냐고, 이 세상 재미진 책을.)
초등학교, 그러니까 그때는 국민학교였던 그 때, 아마 3-4학년이 막 되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동네에는 책 외판원이 돌아다녔다. 엄마는 그 책 외판원을 통해 계몽사에서 나온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 30권을 구매하셨다. 1981년이 초판인 책인데 전권은 60권이고 앞의 30권까지는 외부가 파란색, 뒤의 30권은 외부가 갈색(또는 짙은 보라?)이었다. 아마도 경제적 이유로 그때 엄마는 나와 동갑의 아이가 있는 옆집과 사이좋게 나누어 30권씩을 구매하셨던 터라, 우리집에는 30권의 파란책 밖에 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9번은 소공자였고, 10번이 소공녀였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책. 1-30번까지의 책은 세계 각국의 전래동화집(영국동화집, 프랑스 동화집, 남유럽 동화집, 중국 동화집 등이 있었다. 내가 지금 쓰는 아이디 ashima는 이 시리즈의 중국 동화집에 실린 동화 <아시마>에서 기인한다)을 비롯한 아동용 이야기가 많았고, 후반 31-60 까지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시작으로 세익스피어에 레미제라블, 돈키호테, 삼국지, 서유기 같은 고전 축약본(즉,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아동용으로 축약, 개작한 것)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두 집이 책을 나눠서 살 때에는 서로 다 읽고 나면 돌려가며 읽자가 약속이었을 텐데, 활자에 미친 나는 그 30권을 후루룩 뚝딱 다 읽어버렸고, 책을 그다지 읽지 않았던 옆집에선, 아직 누구도 그 책을 전부 다 읽지 않은 상태여서(게다가 후반부 30권은 아이들이 탐낼만한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무려 성서 이야기라는 성경 축약본도 한권 들어간 시리즈였으니까.) 책을 빌리려고 하면 눈치를 주었다. 처음에는 눈치를 주는 정도였는데 나중엔 대놓고 거절을 해서(아직 안 읽어서 못 빌려 줘.) 후반부 30권 중에는 읽은 책 보다 읽지 않은 책이 더 많다. (그래도 조르주 상드의 <사랑의 요정>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쇼팽의 연인 그 조르주 상드) 명작의 축약본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는지라, 읽지 않았음이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니까 별로 아쉽지는 않다.
정말 미친 듯이 좋아했던 전집이었지만, 그때도 어렴풋이 이거 뭐가 빠진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더랬다. 그때는 완역의 개념도 잘 모를 때여서 무의식중에 이게 원문의 전부일까? 하는 생각. 완역에 집착하는 나는, 그래서 이 책들을 읽던 ‘시기’가 그리울 뿐, 이 ‘책’ 자체가 그립지는 않았다. 소장의 욕구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축약본과 다이제스트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목록 그 자체는 나에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시공주니어와 웅진주니어에서 완역본을 출간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읽었던 책들을 기준으로 사모으기 시작했다. 오오 완역본이다아아아아아! 외치면서. 극도로 총애했던 몇몇 이야기들은 (소공자, 소공녀, 작은아씨들) 출판사별 완역본을 다 가지고 있다. 번역가가 다르니까. 그 외에도 이 30권 안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책들의 완역본을 모두 소장했다. 여러 형태로. <쿠오레>라는 제목으로 이 전집의 23번이었던 책은 창비아동문고 <사랑의 학교1,2,3> 완역본을 가지고 있고, 17번 십 오 소년 표류기는 열림원에서 나온 쥘 베른 전집을 갖추면서 완역본을 갖췄다. 18번 엑토르 말로의 <집 없는 아이>는 궁리 출판사 판을 가지고 있다. (시공사에서 이 책의 완역판은 왜 안냈는지 모르겠다)
전집의 추억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곽아람의 『어릴 적 그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집들은 이 계몽사 <소년 소녀 세계문학전집>을 제외하고는 단 한 질도 나의 ‘소유’ 였던 적이 없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종종 에이브 전집-ABE 88-과 혼동되어 검색된다. ACE 88이 좀 더 어덜트한 소설들이 많았다. 어차피 축약본이었겠지만 반지의 제왕까지 수록된 전집이었다.)은 나와 두 살 터울의 외사촌이 가지고 있었다. 이 전집에서 <백만년 에이라>를 처음 읽었을 때의 매혹은 대단했다. 그 뒤 진 M. 아우얼의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모두 소장했다. (물론 완역이다. 하하하) 외가에 갈 때마다 함께 놀자는 사촌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책장 앞에 붙어있게 만든 전집이기도 했다. 다행히 이 전집의 소유주였던 두 살 아래 사촌동생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활자벌레여서 내가 책을 빌려보는 걸 조금도 고까워하지 않았지만, 그렇게도 너그러웠던 외숙모도 이 책을 빌려주려 하지는 않으셨다. 이 전집은 당시 “오늘 세계 아이들 최고 책 에이스”라는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어있었고 외숙모는 이 책을 사 준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아마 많이 아끼셨던 모양이다. 책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 전집에 이가 빠지는 것을 혐오 수준으로 싫어하는 나는, 그때도 외숙모를 원망하지 않았고, 지금은 너무나도 이해한다. 어쨌든 자주 만나던 사이지만 아무래도 남의 집에 있는 책이라 이 88권을 전부 독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이 전집의 몇몇 소설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아, 외숙모는 다른 책은 아주 잘 빌려주셨다. 그리고 나는 외숙모의 책장에서 무려 세로 쓰기로 된 <왕비열전> 전집을 빌려 읽었다. 하하하.)
지경사 판 <소녀 명랑 소설> 시리즈는 큰언니의 단골 선물이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5살 터울의 언니는 생일이나 어린이 날, 크리스마스 같은 때에 이 시리즈의 책을 한권씩 사 주었다.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가 언니의 첫 선물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나중에 언니는 작은 아씨들 시리즈의 후속편을 사서 선물해 주었다. 계몽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의 8번 작은아씨들은 베스가 병을 앓았다 회복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작은아씨들 1부인 셈이다.) 그 뒤로 언니는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의 책을 때마다 한권씩 사 주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 안에, 소설판 캔디캔디 1,2,3이 있었다. 아빠를 조르고 졸라 이 세 권을 사서 옥상에 누워 읽었다. 하늘은 새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햇살이 무섭도록 쨍하던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날이 그렇게 좋으면 캔디 캔디를 읽던 날이 떠오른다. 아아, 나의 테리우스.
곽아람은 1979년생이다. 나와 거의 동년배인 셈이라 우리의 유소년기를 지배하는 책은 거의 겹친다. 다행히 나는 ‘이야기’에는 집착하지만 ‘책’ 그 자체에는 집착하지 않아서 곽아람이 겪은 책 수집의 에피소드는 없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그 책을 소장하고 싶은 욕망은 전혀. 그저 너도? 나도! 반가워!!! 라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곽아람의 책을 읽고 바로 어느날 구입해 반쯤 읽고 책장에 던져뒀던 중앙일보 문화부장 이영희의 책 『안녕, 나의 순-정』을 꺼내 다시 읽었다. 나의 초-중등기를 지배했던 것의 팔할이 문학(정확히는 동화, 영 어덜트 소설)이었다면 나의 고등학교 시기를 지배했던 것은 구할이 만화였다.
그 시절 연년생 언니와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순정만화 잡지들은 이제 없다. 성인이 돼 독립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본가에 돌아가니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보지도 않는데 쌓아두면 뭐하니? 먼지만 쌓이고 벌레 생겨” 라고 엄마는 냉정하게 말했었지.
이영희, 『안녕, 나의 순-정』, 다산북스 놀, 2020, p.6
이 경험, 나도 있다. 하하하. 만화잡지 <윙크>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3년 8월에 창간되었다. 격주간지였고, 한권에 2500원이었다. 창간호부터 사모았다. 울엄마가 무슨 맘인지 그때 윙크 살 돈은 꼬박꼬박 주셨고, 집에 한권 한권 쌓아두는 것도 그냥 두셨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낙이었다. 대학을 가느라 집을 떠나면서 그 잡지를 얌전히 라면박스에 넣어 고이 보관했다. 또 한 번, 엄만 대체 무슨 마음이었는지 그 만화잡지 박스를 이사하면서도 버리지 않고(내가 대학을 들어간 뒤 우리집은 사정상 두 번의 이사를 했다, 내가 없는 사이)잘 들고 다니셨다. 몇 년을 잘 데리고 있던 엄마는 어느날, 그 책을 묻지도 않고 싸그리 버려버렸다. 윙크가 단종되어 전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다음의 일이라 아까워서 속이 쓰렸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고등학생이던 우리 교실엔 정해진 책 공급책이 있었다. 할리퀸 로맨스는 수영이가 공급했다. 매달 새로운 책이 나오면 만화방에서 빌려와 순서를 정해놓고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끼워넣고 읽었고, 나는 윙크 공급책이었다. 단행본 만화 공급책은 민지와 몇 명이 더 있었다. 할리퀸 로맨스는 만화방이나 책방에서 빌려오는 거였고, 단행본 만화는 각자 모으는 책이나 소장하고 있는 책이 달랐다. 우리는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아르미안을 읽었고, 레드문을 읽었고, 불의 검과 점프트리 에이플러스를 읽었다. 아, 지금도 기억나는, 이은혜 작가. 우리 여고 앞에 와서 사진을 찍어 가는 걸 봤다는 아이가 있었지.
한동안은 또, 그때 봤던 만화책들을 엄청나게 사 모으던 시기가 있었다. 중고나라를 통해, 불의 검이니, 안녕 미스터 블랙이니, 이은혜의 책들을. 30이 가까워 오던 나이였다. 결혼을 했고, 내 책장을 보던 남편은 딱 두가지를 말했다. 사조영웅전을 보고는, “나는 무협지를 사서 읽는 사람을 본 건 네가 처음이야.” 했고 만화책들을 보고는 “나는 만화책을 사서 읽는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했다. 하.하.하. (그러는 남편도 신의 물방울은 사서 읽었다. -물론 다 팔아치웠다, 내가.)
아무래도 만화책이라. 딱히 소장의 욕구가 강하지 않은데다 권수도 워낙 많아서 다 팔아 치우고 몇 개만 남겨두었다가 몇 번의 책장 구조조정을 하던 중에 마저 다 팔아치워 버렸다.
마지막으로 팔았던 만화책이 이현세의 <남벌>이었다. 하도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순정도 아닌데!) 학산문화사에서 애장 박스판이 나왔을 때 냅다 사서 소장하고 있던 책이었다. (이 책을 주문할 땐 남편도 신의 물방울을 살 때라 뭐.) 팔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가 가격도 별로 내리지 않고 당근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다. 팔리면 팔고, 아니면 안고 갈 생각이었다. 올린지 한 반년이 지났을 무렵인가 갑자기 연락이 왔고, 팔았다. 구매자는 우리집 근처 지하철 역을 거래장소로 지정했고, 우리는 지하철 역 앞 파리바게트에서 만났다. 나온 분은 뜻밖에도 50이 훌쩍 넘어 60 가까이 되어보이는 아저씨였다. <남벌>을 사서 읽겠다고 지하철을 타고 와서 중고거래를 하는 아저씨라니. 그는 나를 보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내가 만화책을 사러 간다고 했더니 안그래도 아내가 퉁박을 주더라고요. 무슨 만화책을 사서 보냐고.” 무슨 답을 하겠는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네네, 아내분은 그럴 수도 있죠. 대답을 하는데 그분이 책이 든 쇼핑백을 아주 소중히 안아들며 그랬다.
“내가 옛날에 읽은 만환데, 하도 재미있게 읽은 추억이 있어서 꼭 다시 읽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어요.”
어정쩡하고 어설프게 네네, 재미있게 읽으세요.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나도 마흔이 넘어 만화책 중고거래를 하는 아줌마가 될 줄은 몰랐고, 그분도 육십이 다 되어 만화책을 사들이는 아저씨가 될 줄은 몰랐겠지. 우리의 나이는 거의 15년 이상 차이가 났지만 같은 만화책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시기 이후로는 만화를 거의 보지 않아서(나는 웹툰도 보지 않는다.) 만화에 대한 추억은 고등학교 시기를 전후로 하여 거의 멈춰있다. 그래서 이영희의 책에서는 내가 모르는 만화 이야기가 더 많다. 이영희 기자는 아마도 나보다 한두살 많을 것도 같은데 말이지.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며, 이승환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문을 외어 보자~
내가, 완역을 핑계삼아 어릴 때 집착 수준으로 좋아하며 읽었던 책을 사서 모으는 이유는, 이 책들이 주문이기 때문이다. 나를 그때 그 순간으로 데려가는, 마법의 주문. 끝내 외숙모의 책장에서 빌려 읽었던 세로쓰기 왕비열전까지 기억하게 만드는, 그 시기의 나를 다시 불러내어 그때의 그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최근에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그 외숙모의 남편이었던, 우리 엄마와 관계가 아주 각별했던, 우리집 딸들을 모두 고루 아껴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나를 더 많이 편애하셨다는 것을 그분도 알고 나도 아는 그 외삼촌이 갑자기.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촌을, 그 ACE 88의 소장자였던 그 사촌을 거의 10년만에 그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사촌도 장가를 갔고, 나도 시집을 갔으니, 내가 명절에 외삼촌에게 인사를 갈 때쯤, 사촌은 이미 아내와 처가에 간 뒤여서 만날 일이 없었다. 그 사이 집안 행사도 없었고.) 장소가 장소임에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은 반가웠다.
문득, 그 사촌에게 간만에 전화라도 할까보다. 너 ACE 88 기억하니? 라고 묻게.
2025.7.27. by ashi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