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2
아시마의 라이브러리
  • 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 13,500원 (10%750)
  • 2013-03-27
  • : 157

 『그 형제의 연인들』by 박경리

 

읽은 날 : 2025.1.23.

 

박경리 장편 아홉 번째 소설이다. 이전 장편 소설의 제목은 그 주제를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한데 이 소설의 제목은 매우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소설 이후 나오는 『김약국의 딸들』이 진짜로 김약국의 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식으로 이 소설 역시 그 형제-심인성과 심주성-와 그들의 연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이 직관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럴까, 이야기 역시 직관적이고 구체적이다. 그 시대로서는 드물디 드문 저택에 살면서 호화판 댄스 파-아티를 열고, 음대를 다니는 성악가이거나 작곡가, 또는 재벌가 아들이라는 식의 백마 탄 왕자님이나 탑 속 공주님을 잔뜩 등장시켜 로맨스 없는 로맨스 소설같은 느낌을 주던 이전의 이야기와는 달라졌다.

 

그 형제 중 형 심인성은 개인병원을 차리고 있는 내과 의사다. 사랑 없이 적당히 조건 맞춰 결혼한 아내 현숙은 임신 중이고(소설 초반에 딸을 낳는다) 병원은 뭐 썩 잘되는 것 같지는 않다. 동생 심주성은 K대학 독문과 졸업반이고, S대학 약대생인 송애와 집안끼리의 친분으로 혼담이 오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 두 형제의 아버지 심상호씨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 집안은 나름 유복한 편이기는 하나 박경리 소설의 남자 주인공들 치고는 제법 많이 땅으로 내려왔다.

 

첫 사건으로 일어나는 혜원의 맹장염과 인성의 냉정함은 인상적이다. 혜원의 집으로 왕진을 간 인성은 맹장염의 진단을 내리고 수술을 해야한다고 말 해 줄 뿐, 수술비가 없다는 혜원의 동생 혜준의 말에도 냉정하게 돌아선다. 그냥 두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주인공이 이렇게 차갑고 비도덕적이라는 사실(이건 전광용의 꺼삐딴 리나 할 행동이 아닌가.)을 통해 박경리는 인성이 삶만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이미 방기한 상태임을 보여준다. 타인의 죽음에 간여하지 않는 태도는 죽음 그 자체에 이미 초탈한 사람만이 취할 수 있다. 인성은 그저 살아 있으니 살아갈 뿐. 그랬던 인성이 정말로 죽음을 목전에 둔 폐결핵 환자 규희를 만나 ‘살아 있음’에 집착을 보이며 점점 살아난다.

 

지금까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려 했던 인성이나 일종의 자학 의식에 사로잡힌 규희나 다 같이 육체보다 어떤 정신적인 환자가 아니었던가. 그 정신적인 환자들이 지금 서로 다가서려 하고 있는 것이다.

(p.103)

 

주성은 형인 인성과는 정반대의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 앞에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이 없다.

 

“산다는 것은 주장이야. 절망을 뛰어넘고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을 주장하는 거지 뭐야.”

(p.133)

 

세상의 인습과 윤리적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 연상의 이혼녀, 친구의 누이 혜원을 사랑하는주성은 절망일 때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송애가 오만하다 말을 해도, “이 세상에 내가 나온 것을 주장하는데 어째서 오만하다는 거야?”라 반문할 뿐이다.

 

이랬던 주성도 세상의 장벽 앞에 바스라져 가는 혜원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대신 상대를 위해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이 소설은 그렇게, ‘그 형제’가 각각의 ‘연인들’을 만나 변화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전 소설에 비하면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이. 규희의 전 약혼자 상진과 바람을 피우는 현숙에 대해 인성이 보이는 태도는 아, 이 사람이 정말로 변했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건, 사랑과 연민에 대한 작가의 변화다.

 

『토지』에서 박경리는 연민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태도를 길상과 그의 아들 환국과의 대화를 통해 명확하게 보인다.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일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사별의 슬픔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슬픔보다 연민에서 오는 슬픔이 한층 더 진할 것 같구나.”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

공격하듯 말했을 때,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 된 천애고아인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박경리, 『토지』5부2권(통권17), 마로니에북스, 2012, p.28

 

결혼 연차가 꽤 된 언니들이 웃으며 농담처럼 하던 “자는 모습이 불쌍해 보이면 게임 끝난 거”라던 말을 실감하던 순간은 박경리에 새삼 감탄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연민은 좀 다르게 쓰인다. ‘인생은 의의 깊은 것이고 의학은 슬기로운 사명의 직업’이라 생각해 의사의 길로 들어섰던 인성은 ‘여러 생명의 마지막을 보면서 삶에 대한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신을 무장하기 위해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적용’했고, 그런 결과가 그의 결혼이었다. 내 삶에 의미가 없는데 아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하랴. 그저 적당히 조건이 맞는 사람과 결혼해 살아가려던 그가, 규희를 만나며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버리고 인정과 도덕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아내 현숙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 이전까지의 냉정하기 그지없는 모습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민은 사랑의 시작이 아니다.

 

‘연민이라는 감정이 동물 아닌 인간에게 향하여졌을 때 그것은 죄악에 가까운 독선적인 것’(p.350)이라는 그의 말은 서희를 연민하였다는 길상의 고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길상의 연민은 그대로 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연민하는 대상을 연민하게 되는 이유를 알면서 그 이유를 없애지는 못하는 인성 자신을 죄악에 가까운 독선이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현숙을 불쌍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은 인성이니까.

 

이야기는 여전히 통속성과 우연의 남발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자꾸만 만나요, 사람들이, 우연히 우연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모두가 발을 단단히 지면에 붙이고 움직이고 있기에 긴밀한 구조를 완성해낸다. 기대 이상으로 좋은 소설이었다.

 

2025.1.23. by ashima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