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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튼
  • 피어클리벤의 금화 1
  • 신서로
  • 13,500원 (10%750)
  • 2019-09-05
  • : 377

 중학생 시절, 도서대여점은 하루에 2번은 방문해야 직성이 풀리던 곳이었다. 학교에 등교하기 전에 한 번, 학교에 하교하면서 한 번. 그 당시 나는 도서 대여점의 오전 알바, 오후 알바, 야간 알바생 언니오빠들과도 친하게 지낼만큼 도서 대여점 방문이 잦았다. 또 도서대여점 방문을 풍성하게 해줬던 건 8할이 판타지 소설이었고 2할이 만화책이고는 했다. 2000년대 후반을 거치며 내가 나이들어가는 만큼 도서대여점은 사라져갔다. 판타지 소설을 쉽사리 읽을 수 있는 창구도 줄어들었고 점점 다른 장르의 책을 더 읽게 되었다.

 10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금 읽어도 재밌다 싶은 나름의 베스트 판타지 소설이 있다.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나 윤현승 작가의 『하얀 늑대들』, 김철곤 작가의 『드래곤 레이디 』, 이경영 작가의 『가즈 나이트』, 김소윤 작가의 『죽음의 서』와 『생명의 서』, 전민희 작가의 『세월의 돌』, 최서완 작가의 『얼음램프』 같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지금와 돌이켜보면 내가 여태 재밌다고 여겼던 판타지 소설들은 전부 소년 혹은 청년이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최서완 작가의 『얼음램프』는 소녀가 주인공이지만 남장을 하는 캐릭터이다. 나는 지금 말할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깨달았다.

너를 먹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작품은 지고의 존재 용(龍)에게서 "한 끼 식사"가 되라는 선언을 도입부로 해 독자의 시선을 빼앗는다. 바로 장르문학 플랫폼 브릿G에서 연재중인 정통판타지, 신서로 작가의 『피어클리벤의 금화』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처음부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용의 먹이 선언과 그런 용과 교섭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바꾸어 나가는 주인공 울리케의 캐릭터는 그간 보지 못했던 신선함이 있었다. 구조대조차 바랄 수 없고 평민과 다름 없이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가난한 영지 피어클리벤과 피어클리벤 남작의 열 세자녀 중 여덟번째 딸에 불과한 울리케는 굉장히 특별했다. 만약 울리케가 여덟번째 딸이 아니라 여덟번째 아들이었더라면 이런 낯섦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언변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바꾸어 나가는 것은 『하얀 늑대들』의 카셀과 약간 비슷하지만 카셀의 언변이 임기응변 판타지인 데다 주변의 사람들을 홀리는 먼치킨적인 매력에 가까운 것이라면 울리케의 언변은 정치적인 교섭에 가깝다. 울리케는 누군가의 마음을 매력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학구적인 지식을 언설하거나 논리적인 생각으로 설득을 해낸다.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굉장히 서사가 탄탄한 소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서사가 탄탄한 소설의 배면에는 소설의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그런 세계관이 존재한다. 피어클리벤 영지를 비롯해 제국이라던가 류그라들이라거나 고블린이라거나 소설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기둥 하나 하나가 탄탄하다. 각각의 제도와 문화적인 측면은 정말이지 꼼꼼하게 구현되고 있다. 특히 울리케의 두 번째 교섭 대상이 되는 고블린 아우케트의 입을 통해 듣는 고블린 종족의 문화나 시야프리테의 류그라 무리들의 생활상 같은 것들을 보면 작가의 빈틈없는 설계가 돋보인다.

 요즘 나오는 로맨스 판타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여성이 선택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려지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그러니까 마법이나 검술, 부(富)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선택을 좌우 당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삶 같은 것 말이다. 예전에는 평민 소녀가 고위 계층을 만나 인생을 반등하는 류의 신데렐라 서사가 주류였다면 요새는 역하렘이라거나 역신데렐라 서사라거나 여성 주인공이 전문적인 직업을 갖는 소설 등의 비율도 꽤 높아 졌다. 회귀, 빙의, 환생 등의 소재 역시 로맨스 판타지에 많이 등장하는 클리셰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 주인공이건 수동적인 주인공이건 그들은 꼭 연애를 한다. 연애를 위한 주체성, 연애를 위한 수동성이다.

 신서로 작가의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로판이었더라면 종족이 아예 다른 아우케트는 울리케를 짝사랑했을 것이고 용 빌러디저드는 폴리모프를 해서 울리케와 맺어지는 진남주가 됐을지도 모르며, 까마귀 용병단의 크누드 역시 서브 남주로서 울리케에게 반했어야 마땅하다. 울리케의 자매 아그니르는 기사 양성소의 교관이었던 크누드를 짝사랑했던 과거가 있을 것이고, 울리케의 남동생 디드리크는 자신의 스승이 된 시그리드에게 연모의 마음을 품을 것이다. 이 소설이 로맨스 판타지라면, 그렇게 물고 물리는 관계가 그려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어클리벤의 금화』 는 그야말로 정통판타지다. 530쪽에 이르는 1권을 읽는 동안 나는 소설 전반적으로 로맨스의 싹은 1도 보지 못했다. 2권부터는 또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 지 알 수 없으나, 1권에서만큼은 울리케는 용 빌러디저드와도 아우케트와도 크누드와도 로맨스 라고는 1mg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것은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울리케의 발길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사는 땅인 피어클리벤에 대한 애정과 영지의 부흥을 위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부분에 대한 고찰이었다. 울리케의 캐릭터는 『드래곤 라자』의 칼 헬턴트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그와는 입장이 다르다. 헬턴트 영주의 남동생인 칼은 은둔 현자의 느낌으로 소설 속에 그려지지만 울리케의 경우, 정말이지 찢어지게 가난한 영지의 여덟번째 딸로 태어나, 용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상황에 내몰려 본인의 정치적이고 경제 · 사회적인 통찰을 발굴하고 키워 나가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여성 독자로서『피어클리벤의 금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개인적으로 고무할만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울리케는 말할 것도 없고, 기사를 꿈꾸는 아그니르 라거나 울리케의 죽은 생모보다도 더 울리케와 닮아있는 남작 부인 아셰리드, 뛰어난 마법사인 시그리드와 궁사인 브륀힐데, 류그라들의 말썽꾸러기인 시야프리테, 류그네릭 이라는 약을 먹고 어떤 힘을 갖게 된 베르벳, 뭔가 세상을 뒤흔들 사건의 흑막으로 보여지는 아이슐리드 등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이 여타 읽어온 판타지 소설들 중 가장 활발하다. 또 가장 사건적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사건의 배경이 되지 않고 사건 속으로 들어가거나 사건 자체를 생성해내는 역할을 갖는다.

 여성 캐릭터들의 활약이 큰 판타지 소설, 영지 경영이라는 소재의 판타지 소설의 등장이 반갑다. 앞으로도 『피어클리벤의 금화』과 함께 달려볼 생각이다. 『피어클리벤의 금화』 2권을 주문했다. 올해 안에 3권도 4권도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건 좀 어렵겠지. 『피어클리벤의 금화』가 마중물이 되어 좀 더 다양한 여성 서사의 판타지 소설들이 쓰여지기를, 사랑받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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