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서평을 자주 쓰진 않았지만, 한 달에 두 세 권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개중에 이번에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감겨진 눈 아래에>를 읽게 된 건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해당 소설집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부터 판타지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가부장제'라는 세계의 속박 속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여성 서사 작품집이다. 7명의 작가들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한 편 한 편 읽어내려가는 게 즐거웠다. 7가지 다 맛있는 초콜릿인데 어떤 건 아몬드가 들었고 어떤 건 딸기 시럽이 들었고 어떤 건 녹차크림이 들어 있는 것처럼. 7명의 작가들의 7 작품은 하나 하나 품고 있는 이야기가 달랐고 그 이야기가 주는 마음의 울림이 달랐다.
· 정도경 「황금 비파」
정도경 작가의 「황금 비파」는 마치 전래 설화를 읽는 것 같은 매력이 있었다.
비파를 연주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쓰여진 점과 궂은 날씨를 여자를 잘못 태워 그렇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뱃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예전에 음악을 하는 사람을 딴따라 라고 부르며 비천히 여겼던 점이나 뱃사람들이 흔히 갖는 -바다를 여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배에 탄 여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미신을 고스란히 반영한 듯 했으며, '호수의 왕' 관련한 부분에서 신부가 될 위기에 처한 여자가 비파의 줄을 풀어가며 피를 머금은 황금 비파를 켜게 되는 서사는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바탕인가도 했다.
아무래도 가장 좋았던 점은 여자가 '호수의 왕'을 죽이고, 배에서 자기를 죽이려 했고 뭍에서 여자를 범하려 했던 뱃사공을 죽인 점이 마음에 들었고, '물 밖의 세상에서 버려진 여자들'과 함께 공생하며, 물 밖의 세상에서 버려질지도 모르는 여자들을 지켜나가는 결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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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경 작가는 아무리 봐도 SF존잘님인 정보라 작가님인데 왜 정도경인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이 하나.
· 김인정 「망선요」
「망선요」는 중년의 엄마와 이십대 딸의 대화를 기본 틀로 쓰여졌다.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엄마와 딸의 대화는 통하는 듯 통하지 않는 듯 계속해서 겉돌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딸이 공부방 자원 봉사를 통해 만난 '초희'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초희에게 자신을 덧대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과거 딸에게 했던 일들을 기억하면서도 기억하지 않는 척 하려고 노력한다. 딸과의 대화를 통해 기억나지 않는 척 하는 엄마의 말은 거짓이라는 암시가 드러나지만, 소설을 읽는 우리는 알고 있다. 망선요 속의 딸의 경험이, 그때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는 엄마의 모습이 사실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가정에서 일어나기도 하는 일이라는 걸.
이렇게 소설은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를 소재로 다루면서도 절대 이를 드라마틱한 용도 혹은 재미를 더하기 위한 요소 등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현실반영적인 느낌조차 든다.
· 이산화 「아마존 몰리」
「아마존 몰리」는 길을 가던 여성을 폭행한 생명공학자와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한 과학잡지 기자의 인터뷰를 그린다. 생명공학자가 겪은 경험은 물론 독특하며 흥미롭다. 썸을 타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사실은 자신을 통해 실험을 해왔다는 사실은 생명공학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여자가 생명공학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던 '단성 생식'에 대한 것은 단성 생식으로 새끼를 낳은 아나콘다도 있고 작년에 배태한 쥐의 사례도 있고 가능성이 있는 미래이기도 하다.
생명공학자의 캐릭터는 요 근래 많이 잃어나는 범죄자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정 인물, 혹은 단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으면서 해당 인물 혹은 단체에게는 어떻게 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던 만만한 사람에게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 또는 썸을 탄 여자가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라는 사실 때문에 기실 입은 경제적이나 육체적 피해를 입은 것은 1도 없으면서 스스로를 지나치게 연민하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합리화하는 태도 같은 것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과학기자가 생명공학자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인터뷰어로써 인터뷰이와의 거리를 확실히 유지하면서 듣고 싶은 대답을 받아 낸다. 또한 정말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었는데, 자신을 떠난 여자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혹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그 이유라도 명쾌하게 들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명공학자의 말 그 다음 페이지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선충에게 실험에 대해 설명해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실 소설 전체를 아울렀을 때 큰 의미를 갖지 않을지도 몰라도 개인적으로 치이는 문장이었다.
· 양원영 「폐선로의 명숙 씨」
소설은 가부장적이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버지는 경상도 남자처럼 무뚝뚝하고, 거칠고, 가부장적이며 체면을 중요시하고 이기적이던 사람이다. 가족들로 하여금 가난을 걱정하게 하지 않았고 딸과 엄마의 안전을 생각했고 가족 간의 화목을 중시하며 가족 행사를 챙기는, 우리 모두가 아는 아버지의 상이다. 강이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혼자 남은 엄마 곁에 내려와 지내기로 한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 이후로 기찻길에서 뱀에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곤 한다. 또 다른 사람이 되는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는 것처럼 딸인 강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소와 다르게 서울말을 쓰기도 한다. 엄마의 이런 반응은 신문에 난 '해운대~송정 구간 동해 남부선 폐선로'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엄마의 요청에 따라 함께 가게 된 폐선로에서 강이는 엄마와 아빠의 만남 속에 실린 비밀을 알게 된다. 그 비밀은 강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서울 말씨를 쓰는 엄마와, 아니 명숙 씨와 관련이 있을 터이다. 엄마는 날개옷 대신 기억을 뺏겼다. 선녀는 아이를 낳고 날개옷을 되찾아 천상으로 돌아가지만 명숙 씨는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고 평생을 명숙이되 명숙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명숙 씨와 강이의 캐릭터는 굉장히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망각이 아닌 기억의 단절로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빼앗긴 명숙 씨. 그리고 이미 모든 비밀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버림 받지 않기 위해 빛바랜 엄마의 흔적들을 변기에 흘려보내는 딸 강이. 생을 저당 잡힌줄도 모르고 빼앗긴 엄마와 버림받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죄책감을 그대로 이어받는 딸의 이야기는 괜스레 마음을 먹먹하게 한다.
· 유월 「사형 집행인 비르길리아의 하루」
「사형 집행인 비르 길리아의 하루」는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갖고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코헨체른 백작부인과 대를 이어 사형 집행인 일을 이어가는 비르길리아의 모습을 통해 소설 속 사회는 계급제에 기반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두 여성이 등장한다.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어 사형집행인이 된 비르길리아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죽여 사형 선고를 받은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다. 코헨체른 백작부인은 그녀와 그녀의 두 딸을 학대한 남편을 살해했고 그 결과 비르길리아에 의해 사형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
코헨체른 백작 부인의 처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아픔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올해 국감자료에 의하면 가정폭력 피해자의 75%가 여성이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여자교도소에서 살인죄로 복역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가정 폭력 피해자이다. 가정 폭력을 수십 년간 견디다 못해 살기 위해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처벌의 수위 역시도 동일 범죄의 경우 남성의 처벌이 여성의 처벌보다 가벼이 책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는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알고 있다. 남편을 토막살해한 여성 범죄자의 신상과 얼굴은 밝혀져도 대부도 토막살해범의 신상과 얼굴은 잘 모르는 경우와 매한가지다.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 이야기한 재판의 과정도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죄인인 코헨체른 백작 부인을 제외한 재판관들, 참관인, 사제들 모두 아내를 둔 남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이 느끼기에 못난 부인을 그들이 느끼기에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니다. 즉 당사자성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판결이었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살인을 목격하지조차 않은 코헨체른 백작의 동생의 증언이다. 굉장히 부조리한 일이다.
비르길리아는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이 되었지만 드문 '여성' 망나니이기 때문에 사회의 야유를 받는 인물이다. 또한 "공포로 심판을 대리하고, 자비로 신성을 대리하"는 사형 집행인으로서의 직업 윤리를 지키고자 노력하는데, 이는 코헨체른 백작 부인이 겪는 부조리를 목도한 이후 대리하게 된 심판이 정녕 신성하고 정당한 심판이 맞는 지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된다. 아마도 우리의 비르길리아는 그렇게 계속해 심판을 의심하는 심판의 대행자가 될 것이다.
· 김이삭 「애귀」
이 소설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문전성시를 이룬 평양냉면집에서 출발한다. 소설의 화자는 '애귀'로 추정되는 존재의 시선이며, 소설의 주인공은 평양에는 가 본 적 없고, 평양냉면의 맛도 몰랐던 탈북 여성이다. 여성은 서울 마포에서 처음 평양 냉면을 먹어보았다. 여성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비치는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탈북 이전의 삶들을 떠올린다.
「애귀」를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은 실제 탈북 여성을 만난 것 같은 현존감 때문이었다. 탈북을 위해 정말로 두만강 강물을 건널 것 같았고, 소설 속 여성이 겪었을 그런 아픔들을 겪을 것만 같았다. 탈북민이 한국으로 귀화해 새터민이 되었을 때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도 생각이 났다. 개중에는 여성이기에 겪었을 일들도 많았다. 갈 곳 없는 탈북 여성이기 때문에 물건처럼 애 낳는 기계로 팔려다닌다거나 귀화는 했지만 여자 등을 처먹는 쓰레기같은 남자에게 등골을 빨아 먹힌다거나 하는 것들.
'애귀'는 갈 곳 없는 귀신이고 귀신들 사이에서 설 곳을 잃은 '애귀'는 늘 사람과 함께 한다는데,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주인공인 탈북 여성의 처지가 '애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갈 곳 없던 여자가 딸인 연주를 낳아 기르고, 아들인 강웨이를 한국으로 맞아들이는 결말이 굉장히 좋았다. 갈 곳이 없는 게 아니라 머무를 곳을 스스로 만들어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전혜진 「감겨진 눈 아래에」
표제작이기도 한 「감겨진 눈 아래에」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읽는 내내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의 세계가 떠올랐고, 굉장히 불쾌했다.
주인공은 부모 세대에 프랑스로 망명을 한 한국계 프랑스인인 세실 강이다. 세실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을 떠난다. 그녀는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과 국제 엠네스티 소속으로 방문을 한 것이라는 점을 방패로 한국으로 떠났지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입대라는 명목 하에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거기에는 그녀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세실이 끌려가게 되는 계기는 그녀가 한국계이며, 국적이야 어쨌든 한국인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근미래의 한국은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공항에서 세실은 해외에서 건너온 보급품 취급을 받는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군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군사 훈련을 수행하는 군부대가 아니다. 근미래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하는 병역은 2년 안에 한국 국적의 아이를 임신해서 그 아이를 낳거나, 그게 아니면 복무 기간을 백퍼센트 채우는 것 뿐이다. 복무 기간을 채운다는 건 말 그대로다. 성적인 착취를 강제 당하는 것이다. 그것도 인적 자원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말이다.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기준 역시도 우습다. 모든 여자는 20대 초반, 늦어도 24세까지 이따위 병역을 수행해야 하고 모든 남자는 이 의무를 30세 까지 연기할 수 있다. 이미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는 플라코스 시스템으로 인공 자궁을 통한 임신 출산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한국은 끝까지 여성의 몸을 아이를 낳는 자궁으로 사용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성은 등급화 되기도 한다. 1등급-3등급까지. 세실은 학벌이 좋지만 처녀가 아닌데다 과체중이라 3등급을 배정 받는다. 소설 속 한국은 여성을 외적 기준으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등급화 하는 사회이다.
「감겨진 눈 아래에」속에 그려지는 근미래 한국은 사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에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도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여성은 왜 군 복무의 의무를 지지 않느냐며 열폭하는 남자들을 본다. 자기도 총각이 아닌 주제에 '처녀'에 대한 환상에 허우적 거리는 남자들을 본다.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남자들을 본다. 여성을 그저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자들을 본다. 소설 속 근미래 한국에서 여성들이 받는 취급은 현재에서 몇 발자국 더 나간 것에 진배 없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정부 부처에서 가임기 여성 인구 지도를 만들었던 일은 여성을 인구 생산의 보조물로 보는 것과 다름아니다. 여성은 제 몸으로 한 임신인데도, 제 피와 살과 시간을 들여 키워낸 아기인대도 주체가 되지 못한다. 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낳을 아이가 중요하고, 아이가 중요한 이유는 국가를 유지하는 세수를 위해서일 뿐이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산모에 대한 제도나 아이 양육에 도움이 되는 제도 같은 것들은 제대로 운영하지도 않고 어딜 가나 노키즈존, 어딜 가나 맘충을 찾는 사회 분위기를 깊숙이 느끼고 있다. 게다가 리얼돌 수입이 가능해지면서, 리얼돌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성의 인권은 성적인 의미로 밖에 보이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그런 얘기가 있었다. 폭력적인 게임을 하면 폭력적인 사람이 될지도 모르니 그런 게임들을 규제해야 한다고. 그런데 왜 리얼돌은 그렇지 않을까. 여성의 몸을 본뜬 리얼돌 뿐만 아니라 아동을 떠올리게 하는 리얼돌까지 수입이 되는데, 왜 그에 대해서는 여성과 아이를 성적으로만 취급할지도 모르니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왜 리얼돌 수입에 관한 문제가 남성의 인권과 직결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성관계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어떻게 인권의 문제가 되는지 정말 알 수 없다.
내가 「감겨진 눈 아래에」를 읽으면서 너무나도 화가 났던 건 소설 속에 그려지는 근미래의 한국 사회가 앞서 말했던 이유들과 같이 현재의 한국 사회의 거울이나 다름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읽는 내내 분통이 터지고 울화가 치미는 것과는 별개로, 「감겨진 눈 아래에」는 굉장히 잘 쓰여진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통해 다가올지도 모르는 디스토피아 미래를 미리 엿본 것만 같다. 절대 이렇게 되지 말아야지, 절대 이렇게 살게 두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 같은 것도 선다. 정말이지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