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음식과 야만인 음식의 대결
안티고네 2008/10/13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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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비경작지(saltus)―에 높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키빌리타스(civilitas)의 반대 개념이었다. 키빌리타스는 어원으로 볼 때 도시(city)와 연관된 개념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 질서를 뜻한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이상적 생활공간은 ‘도시 주변에 질서정연하게 조직되어 있는 시골지역’이었다. 로마인은 이 공간을 아게르(ager)라 불렀으며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비생산적 땅인 살투스(saltus)와 엄격히 구분했다. 로마 문화에서 비경작지는 부정적 개념이었다. 숲은 주변적 공간이자 배제된 공간으로서 추방당한 주변적 인물들만이 그곳에서 음식을 구한다. 로마인은 이른바 지중해식 음식 유형을 발달시켰다. 그것은 곡물을 재료로 한 빵과 죽을 비롯해, 포도주, 기름, 채소 등 채식류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약간의 육류, 특히 치즈를 곁들이는 방식이다. 염소와 양은 고기보다는 주로 젖과 털을 얻기 위해 길렀다.
그러나 야만인(barbarians)의 생산 양식과 가치 체계는 완전히 달랐다. 켈트족과 게르만족은 수 세기 동안 중부 유럽과 북부 유럽의 삼림을 휘젓고 다니면서 처녀지와 비경작지를 이용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숲에서의 사냥, 채취, 방목 등은 그들의 생활에서 중심적인 일이었다. 빵과 죽 대신 육류가 그들의 음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빵 문화와 고기 문화의 대결
‘로마’ 세계와 ‘야만’ 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가치, 이데올로기, 생산 체제 등이 모두 다르다. 그 간극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며, 두 세계가 2천 년이나 섞여 살았음에도 모든 차이를 없애지는 못했다. 유럽은 오늘날에도 그 심층적 차이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서기 5, 6세기에 시작된 두 문화의 융합 과정에 의해 상당한 정도의 상호접근이 일어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게르만족이 유럽의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되어가자 게르만 문화와 심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게르만족은 ‘비경작지와 야생 상태의 자연’에 대해 그리스․로마의 전통과 대조적인 새로운 시각을 정립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인간 활동의 한계가 아니라 ‘사용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결과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국, 독일, 프랑스 북부 지역 등지에서는 7, 8세기부터 숲을 추상적 면적 단위로 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돼지를 몇 마리 키울 수 있는가로 나타내는 관행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숲의 크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로마의 전통에서는 참나무 숲을 보고 제일 먼저 돼지 사육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고기가 음식 가운데 가장 높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빵이야말로 가장 영양가가 높은 음식으로 간주되었지만, 5세기 이후에 나온 음식에 관한 책들은 고기에 우선권을 주었다. 고기가 중요하다는 점은 특히 지배계급에서 강조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고기는 권력의 상징이며,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생성하는 도구였다. 반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거나 지배층으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났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이것은 프랑크족의 법령집에서 ‘무장 해제’와 ‘육류의 금식’을 같은 차원의 것으로 본다는 데에서도 확인 된다. 고기는 인간에게 가장 잘 맞는 자연스러운 음식이었다.
만일 유럽이 기독교화의 과정을 밟지 않았더라면 빵이 과연 문명의 상징으로서의 지위를 갖는지에 대한 의문마저 제기되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 속에서 빵은 포도주와 함께 중심적인 상징이 되었다. 빵과 포도주는 성찬식의 기적을 상징하는 신성한 음식이었다. 특히 빵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일찍이 정통 그리스도교 편에 섰던 프랑크족은 북유럽에 로마․그리스도교적 음식 모델을 전파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들이 아리우스파 이단을 누르고 ‘진정한’ 믿음을 확고히 했음을 기록한 글들에서 포도주는 정치적․문화적 정당성을 얻어내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9세기에 기록된 한 문헌에서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프랑크족의 지도자인 클로비스(466-511)는 아리우스파인 알라리크와 싸울 때 포도주의 힘을 빌려 전쟁을 수행할 힘과 열정을 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수도원’ 모델과 ‘귀족’ 모델의 대립
음식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 역시 크게 변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절제가 최상의 미덕이었다. 음식은 기쁜 마음으로 즐기되 탐욕스러워서는 안 되며, 풍성하게 제공하되 허세를 부려서는 안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게르만 문화와 켈트 문화에서는 ‘대식가’를 긍정적으로 보았으며, 엄청난 폭식과 폭음이야말로 동료들에 비해 ‘동물적인’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도 특히 만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지역에서는 절제의 미덕이 통용되지 못했다. 동물적인 힘, 육체적이고 근육질의 힘이 강조되었다.
서기 888년 이탈리아 귀족 스폴레토 공작 구이도가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로 초대되었다. 사람들은 ‘프랑크족 관습에 따라’ 그에게 많은 음식을 내놓았다. 그러나 구이도는 소량의 식사에 만족했고,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왕위 선출권자들은 무엇보다도 왕성한 식욕이야말로 국왕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비잔틴 황제 니케포루스 포카스는 야채와 검소함을 사랑했기에 경멸받아 마땅했으며, 작센의 오토는 ‘결코 검소하지 않았고 평범한 식사를 경멸했는데’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반면 아일랜드 콜룸바누스 수도원 같은 북유럽 수도원의 규정은 금식 등에서 엄격하다 못해 가혹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먹는 것을 세속적 가치 가운데 최고로 치는 사회와 관계를 끊으려 했다. 수도원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육류를 피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육류가 지배계급의 음식 중 가장 귀히 여겨지게 되면서 이것이 더욱 엄격하고 강박적으로 되었다. 수도원 문화는 지배계급과 반대되는 가치를 표현하기를 열망한 것이다.
중세초기 유럽사회에 나타난 음식에 대한 태도에는 대립적인 여러 모델들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델들은 일종의 순환고리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하게 된다. 예를 들면, ‘로마’ 모델과 ‘야만인’ 모델 사이의 양극성은 ‘수도원’ 모델과 ‘귀족’ 모델 사이의 양극성으로 대치되었다. 이들 사이의 힘겨운 다툼의 목표는 문화적 헤게모니였다. 그 안에서는 사회 윤리적 가치가 종교적 도덕성과 부딪히고, 자발적 가난의 주장이 권력의 주장과 부딪혔다.
이 책은 단순한 ‘음식의 역사’가 아니다. 저자는 음식의 재료나 조리 방법 등을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놓고 그것과 연관된 사회의 다양한 국면들을 보고자 한다. 예컨대 어느 특정한 음식이 그 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는가 배척당했는가, 그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와 태도가 어떠했는가 등이 이 책에서 다루는 중요한 문제들이다. 다시 말해 음식을 매개로 한 삶의 양태와 의식의 문제, 즉 넓은 의미의 문화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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