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말라고 말하지 않기
<난치의 상상력>을 읽고
한국 사회에서 아픈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논리에서 하루 최소 8시간을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아픈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은 과연 정상일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고, 걸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정말 ‘정상’이라고 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정상은 기준이 된다. 기준은 사회의 모든 구석에 스며들어 작동한다. 대중교통을 타도, 길을 걸어도, 건물에 올라가려 해도,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모두 이 기준이 적용된다. 바퀴가 올라가지 못하는 건물들은 너무나 많고, 지하철의 리프트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사회에서 정한 ‘정상’이라는 기준에 아주아주 운이 좋아서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기준은 사회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심하게는 목숨마저 위협받는다.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제안한다. 사회의 ‘정상’ 기준을 ‘난치’로 하자고. 미디어에서 보여준 휠체어를 탄, 인공와우를 가진 장애인 혹은 환자를 기준으로 두지 않는다. 휠체어를 탔든 타지 않았든, 아파보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몸이 함께 살도록 하려면 낫지 않는 몸을 기준으로 둬야 한다.
“나는 아마 낫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아마 낫지 않은 채로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고 약한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약한 채로 살다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세상에 도달하는 방법은 난치의 상상력일 것이다.”(267쪽)
이제까지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아프지 마.”
“괜찮아질 거야.”
이 책은 이 말들이 왜 올바르지 않은지, 왜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후벼파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이 말들이 우리 사회의 아픈 존재들을 가리는지 알게 해 주었다. 책을 모두 읽은 지금, 나는 저자의 병력보다 우리 사회로 눈을 돌린다. 사회는 사회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다. 사회의 정상을 난치로 정의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서로의 아픔을 존중하고 보살피기에 아프면서도 외롭지 않고, 변화를 향한 의지와 자신의 몸을 모두 지킬 수 있는”(131쪽) 사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