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생각하는 여자’는 실존한다. 그녀는 살아남아 있고 잘 지내고 있다.
솔직히 여기서부터 이미 울컥했다.
학부 시절 철학을 배웠다.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니체, 들뢰즈, 하이데거 등 서양 철학계의 남성 철학자들 사이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그때, 살아있는 여성 철학자들의 생각을 들려주는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언젠가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저자와 독자가 시간을 뛰어넘어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은 내가 대학 시절 여성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우고 싶어 버둥거렸던 외로운 시간들에 보냈던 실체 없는 편지의 답장이었다.
저자 줄리엔 반 룬이 생각할 때 철학의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의 우리 경험들을 분석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저자의 인생 경험에서 출발하여 사랑, 놀이, 일, 두려움, 경이, 우정이라는 여섯 가지 주제에서 나오는 ‘생각하는 여자들’과의 만남과 대화, 사상에 대한 해설이 맞물려 일상에서 흘러가는 개념들을 여성 철학자들이 어떻게 분석하고 어떤 담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지 보여주고, 끝에 가서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하는 여자’로 만든다.
이 책의 모든 장이 좋았지만, 이 아래는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1장에서는 대담하게도 간통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 책을 펼치고 접한 게 간통 이야기라니, 황당했지만 읽어갈수록 이 책에 빠져들었다. 간통이라는 자극적으로 읽힐 여지가 많은 개념에서 뻗어나온 이야기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겨온 헤테로 커플의 1대 1 연애에서 벗어나 더 넓은 관계, 대안적인 관계를 상상해 볼 여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의제에 따라 보았을 때 이 책의 독자로 상정될 만한 여성들은 한 번쯤 우리의 연애와 결혼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이 책과 1장의 ‘생각하는 여자’인 로라 키프니스의 저작을 찾아 읽는다면 좋을 듯하다.
3장의 질문은 이것이다. ‘어떻게 스스로를 팔지 않고 일할 수 있는가?’ 워라밸이 중요한 주제로 떠오르고, 회사를 떠나 내 컨텐츠, 나라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이 시기에 읽어볼 만한 도전적인 주제다. 이 장에 나타난 ‘생각하는 여자’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낸시 홈스트롬이라는 사실이 주제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그는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기계 부속품’으로 바꾸어버린 방식에 대항하여 우리 사회에 나타난 소외를 되돌아보자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와 여성, 그리고 여성의 노동이라는 주제는 개인적으로도 공부를 더 해보고 싶기 때문에 물꼬를 터 둔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인상적이었던 한 문단을 인용해둔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팔아치우지 않으면서도 제 자아의 일부를 판매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지배보다는 자유의 실천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심장부에 있는 허구는 사람들이 다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지 않는 사이에 모든 것의 상품화로 이어졌다. 이는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영역들을 침범한다.’
마지막 장인 6장에서는 우정을 다룬다. 사랑으로 시작된 책이 우정으로 마무리된다니 감동적이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이 장의 ‘생각하는 여자’는 여성학자이자 철학자인 로지 브라이도티다. 일원론, 물질, 스피노자, 유사-유심론 등의 개념들이 등장하지만 (스포일러를 겸해) 내가 이해한 것을 아주아주 간략하게 얘기하자면 로지 브라이도티는 ‘나’ 혹은 어떤 ‘인간’도 중심에 있지 않을 수 있는 삶이라는 가능성을 제시하며 나와 타자에 존재하는 ‘긍정적 차이’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을 유지하는 ‘우정’을 통해 우리를 나와 타자로의 대립적인 구분 대신 우호적인 일원론을 추구하자고 주장한다. ‘나’ 혹은 ‘인간’이 중심에 서지 않는 삶이 아직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도 우정을 윤리적 실천으로 해석한 사상이 흥미로웠다.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아주 어렵지는 않았기에 멈추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여성 철학자들의 사상에 목말랐던 나같은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여성 철학자들의 사상을 저자의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보여주고 이 여성들의 생각을 통해 다른 길로 뻗어나가 보라고, 그리하여 또다른 ‘생각하는 여자’가 되라고 응원해주는 책이었다.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여자친구들에게 꼭 권하고 싶다.
-이 리뷰는 창비 서평단 신청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생각하는 여자’는 실존한다. 그녀는 살아남아 있고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