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는 항상 독자를 의외의 이야기로 빠져들게 만드는 작가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피프티 피플》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책 《지구에서 한아뿐》은 내가 좋아한 두 권의 책보다 그 정도가 더 높다. 이번 이야기의 스케일은 무려 우주까지 확장된다.
농담이 아니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세계관에는 정말 우주의 다른 행성들이 나타난다. 그뿐이랴, 외계인도 나오고 국정원 요원도 등장하고 초록빛 광선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무한하게 확장되는 세계관의 중심은 ‘한아’다. 사람들의 기억이 담긴 옷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수선 예술가이자 환경주의자 ‘한아’. 그야말로 지구에서 하나뿐인 ‘한아’.
한아는 서교동 골목에서 ‘환생’이라는 이름의 옷 수선집을 운영한다. 왜 수선집 이름이 환생이냐면, 오래된 옷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특별한 수선집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나름 평범해보인다. 하지만 한아가 듣기 좋아하는 칭찬이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이고, 가장 심한 욕을 할 때 하는 말이 ‘미세 플라스틱 같은 새끼’라는 게 밝혀지는 장면을 읽은 독자라면 이 주인공이 생각보다 더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야기는 이런 한아에게 무신경했던 한아의 남자친구인 ‘경민’이 여행을 다녀오더니 이상해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민이 안 먹던 가지를 먹고, 심지어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으니 먼저 가라는 둥 한아에게 다정해졌다. 죽을 때가 되면 이상해진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의 변화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한아는 결국 경민이 초록빛 광선을 내뿜는 광경을 본다. 한아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전화를 건 곳은… 국정원이었다!
이 뒤가 어떻게 되는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가벼운 볼륨에 지하철에서 읽기에도 좋은 사이즈다. 한아에게 일어나는 경쾌한 일들을 짐짓 심각한 척 읽는 것도 좋고, 아니면 실실 웃으면서 읽어도 좋겠다. 어느 쪽이든 한아가 겪게 될 로맨스는 속된말로 ‘탈우주급’이니까, 독자는 그 여정을 우주여행을 하듯 편하게 즐기면 되겠다.
여기까지는 혹시라도 소설을 아직 안 읽은 독자를 위해 간략한 홍보글(?)을 써봤다.
만약 소설을 다 읽은 독자라면 아래를 계속 읽어주시라.
---------------(스포일러 포함)----------------
한아의 범상치 않은 로맨스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많다. 우선 한아와 경민의 환경주의적인 삶의 방식이다. 이 소설에서는 요즈음 더욱 주목받는 환경에 관한 고민이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경민이 한아에게 반한 이유도 한아가 지구를 끔찍하게 아껴서였다. 무엇보다 한아는 자기 자신의 몸에 국한되지 않고 전 지구의 생명체를 자신과 같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제목인 ‘지구에서 한아뿐’이라는 제목은 이런 맥락에서 ‘하나뿐인 지구’로도 확장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지구에게 가져야 하는 환경적인 윤리로 읽어낼 수 있다. 우리 개인이 지구에서 하나뿐인 존재이듯, 이 지구도 우주에서 하나뿐인 존재다. 우리가 저지른 많은 환경 파괴가 계속된다면 이 지구가 파괴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게 명확하다.
그 다음은 다양한 인물이 사회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다. 한아와 경민 외에도 유리, 아폴로, 정규, 주영 등 사회를 구성하는 독특한 인물들이 스스럼없이 녹아있다. 그중에서도 말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정규다. 이 소설은 현재 사회에서 국정원이라는 조직이 가진 신뢰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내보이는데, 한아의 제보를 받은 국정원 요원인 정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윗세대가 완전히 망쳐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단 한 사람의 신뢰를 얻자’고. 한국사회는 개인간의 신뢰는 물론이고 정부와 시민간의 신뢰까지도 파괴된 사회다. 정세랑 작가가 염두에 두진 않았을테지만 곧 다가오는 세월호 사건이 생각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금 더 각별하게 읽히는 이야기다. 코로나19가 퍼지면서 보여준 정부의 대처가 그 신뢰를 조금씩 쌓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규도 국정원에서 계속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한아와 정규 외에도 한 인물만 더 꼽아보자면 역시 (외계인)경민이다. 나는 사실 경민을 그렇게 좋아라 할수만은 없었다.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다들 그런 병이 생긴다. 이렇게 잘 해주는걸 봐서는 뒤에 가서 뒤통수를 치는 게 분명하다, 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시달리는 병 말이다(그리고 그런 불안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고약한 병이다). 그리고 역시나 경민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시원하게 한아의 뒤통수를 쳐버린다. 하지만 결말을 제외하고 말하자면 경민은 우리의 인식을 우주로 확장시켜주는 인물이다. 사람이 사는 데 자기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살면 탈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경민이라는 캐릭터는 이 소설에서 자기중심적인 개인, 인간중심적인 사람들에게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생각하라고, 이 지구에는 너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는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경민과 한아의 로맨스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람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사랑이라면, 경민이 한아에게, 그리고 경민이라는 인물이 독자에게 해주는 것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사실상 로맨스의 탈을 쓰고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한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인간들에게 우주적으로 생각해라! 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이야기다. 정세랑 작가의 스물여섯 살이 궁금하면서 동시에 작가가 우주적인 이야기를 지금 써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도 궁금하다. 정세랑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지는, 경쾌하고 유쾌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