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극장 안, 드디어 영화가 시작된다. 푸른 하늘과 작열하는 태양, 황량한 모래벌판을 뒹구는 버팔로의 두개골과 방울뱀, 바람에 뒹구는 회전초가 클로즈업된다. 이쯤 되면 하늘을 향해 목을 곧추세우며 기세 좋게 우는 말소리와 더불어 영화 <황야의 무법자>(1964)의 OST인 엔니오 모리코네의 곡이 귓속에서 저절로 재생된다. 다부진 맨발과 부츠, 화살과 총, 인디언과 카우보이의 얼굴이 번갈아 클로즈업되며 두 남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에게 활과 총을 겨누고 있다. 목숨을 건 대결을 앞둔 이들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려 있다. 총과 활의 대결, 시작부터 불공평한 이들의 대결에 보는 이마저 긴장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이때 이들의 결투를 방해하는 녀석들이 있다.
영화 형식을 취한 이 그림책은 1940년대 서부극의 대표작인 <백주의 결투>(1946)의 제목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스페인 출신으로 유럽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인 작가는 어린 시절 존 포드 감독의 <수색자>를 보고 서부극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어린 시절 보았던 서부극에 대한 기억이 작품 활동에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책 내용에도 서부 영화의 필수품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서로 목숨을 걸고 대립하며 거친 남성성, 개척자 정신, 인디언의 슬픈 운명 혹은 미개함 등을 강조한 정통 서부극과 달리, 이 책은 대결을 펼치려던 두 남자가 그들을 위협하는 다른 문제들 앞에 서로 연대하면서 대결이 우정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한 편의 영화 스토리보드 같기도 한 이 책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숨어 있다. 까만색 면지는 영화 상영 전후 극장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글은 대사처럼 간결하며, 영화처럼 클로즈업과 롱숏을 반복하면서 다양한 시야각을 보여준다. 백주 대낮에서부터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황야의 아름다운 변화를 만날 수도 있다. 책 내용이 끝난 후 엔딩크레딧과 쿠키 컷까지 나오는데 등장인물, 로케이션 정보까지 표시된 엔딩크레딧이 보는 즐거움을 준다. ‘이 그림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친 동물은 없음’이란 깨알 같은 문구를 넣은 작가의 센스에 감탄하게도 된다. 또, 이 책은 자체 사운드 트랙을 가지고 있는데 서부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책이기 때문에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운드 트랙을 만들었다고 한다.
책의 가장 큰 묘미는 두 사람의 결투로 마치 풍선이 터질 듯 한껏 부풀었다가 한순간 바람이 빠져버리는 것 같은 긴장과 수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인디언과 카우보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강 또한 눈여겨 볼만한 요소이다. 강은 원주민과 개척자라는 두 세계를 분리해 두 사람이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처럼 보이게 하는데, 이 강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건널 수 있는 개울 정도 깊이라는 것은 여러 시사점을 준다. 두 사람이 서로의 목숨을 걸 정도였던 절체절명의 문제가 얼마든지 극복 가능한 단순한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 이 강은 서부개척시대 인디언과 백인 간의 슬픈 역사로 인해 이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고 싸워야만 한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림의 독특한 면이라면 인디언과 카우보이의 피부색이 다 붉게 표현된 점, 또 두 사람 다 손가락이 4개인 점을 들 수 있다. 작가는 피부색은 배경인 푸른색과 대조되어 인물에 잘 집중할 수 있도록 일부러 피부를 붉게 표현했다고 한다. 또 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의 갈등을 그림책에 담기는 복잡하고, 이 캐릭터 또한 실제가 아니므로 만화 영화 심슨가족처럼 손가락을 4개로 그렸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이 패러디일 뿐이므로 너무 심각하게는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한다.
여러 유명 상을 수상한 이 그림책은 파리에 소재한 소규모의 한 독립출판사에서 첫 출판 되어 한국어를 비롯한 5개국어로 출판되었다. 아쉬운 것은 영화처럼 만든 그림책이라는 독특한 이력과 풍자와 유머를 겸비한 이 유쾌한 그림책이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과 영어권 나라에서 출간되지 않은 점이다.
두 남자의 결투와 유쾌한 연대기는 어른들에게는 추억에 대한 향수를, 어린이들에게는 유쾌한 웃음과 연대의 따뜻함을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바로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