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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의 다락방
유하 감독이 이소룡을 추억하는 액션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 정도의 정보만을 갖고, 딱 그 정도의 기대를 하고 이 영화를 보았다.
권상우나 이정진도, 한가인도 너무 가벼워 보여서 배우에 대한 기대는 없었고.. 포스터의 이미지만을 보고 내 맘대로 가볍고 유쾌한 액션+로맨스의 킬링타임용 영화라고 생각했다.
유하의 시를 좋아했었고 [결혼은 미친짓이다]도 재밌게 봤었기에 적어도 유치하진 않겠지, 유하가 대본을 썼다니 대사는 좋겠지..하고 봤다.

별 기대를 하고 보지 않아서 인지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꽤 잘만든 상업영화면서도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가벼운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
요즘같이 그야말로 내용이 텅 빈 가벼운 한국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그나마 건질 만한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약간을 슬펐다.

이 영화는 권법소년 권상우가 절대고수로 성장해 악을 응징하고 절세 미녀를 얻는 스토리가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한 소년이 '성장'하는 성장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 '성장'이 진정한 의미의 '성장'인지는 잘 모르겠다.
순수했던 소년은 폭력에 노출되고, 믿었던 우정과 사랑에 버림받고, 온갖 부조리로 가득한 세계를 체험하면서, 자신도 폭력으로 '악'을 응징하기 위해 이소룡처럼 쌍절권을 휘두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응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쓸쓸히 한 계절이 가고, 그는 지저분한 검정고시 학원에서 자신과 똑같이 낙오된 옛 친구를 만난다. 이소룡 영화들이 막을 내리고 성룡의 시대가 시작되며 소년들은 그렇게 한 시절을 마감한다.


친구 수정이의 리뷰에서, '대한민국 학교 다 X같아' 라는 대사가 너무 친절한 설명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내 주위 사람들 중에도 그 대사가 너무 튄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말 한마디가, 권상우가 내뱉을 수 있는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좇같은 학교들을 모두 불 태워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 엄석대는 방화를 저질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 대한민국의 교육을 개혁할 수도 없다. 그는 그저 쌍절곤을 휘두르며 발악하고, 한마디 욕을 내지른체 그냥 떠날 뿐이다.

동생 나연이의 말처럼 그 뒤로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나도 폭력으로 가득했던 중,고 시절을 보냈다. 여중을 나왔기에 중학교 때는 좀 나았으나 - 여중에서도 폭력은 여전했지만 - 고등학교로 들어오면서 그 수위가 강해졌다.
하루하도 안 맞고 다닌 적이 없었고, 그렇다고 맞을 만큼 잘못했던 일도 없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선생님들로부터 쌍욕을 들어야 했고, 선생님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욕을 하고 다녔다.
나와 6년이나 차이가 나는 내 동생의 학교 생활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선생님들이 싫어서 늘 선생님과 말로 싸웠다. 가만히 있으면 화를 당하지 않을 것을 꼭 나서서 더 혼났다. (그렇다고 내가 뭐 장금이 같이 의협심이 있다거나 호기심이 많다거나 한 건 아니었고..나도 어느 정도는 선생님과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우리들의 학창시절은 암울했다.
우리 교복은 회색이었고, 그래서 모두의 얼굴도 잿빛처럼 우울해 보였다. (그때 아마 내가 쥐떼들이라는 시를 썼었던 듯)
아이러니 하게도 학교 건물은 병아리색과 밝은 에메랄드 색이었다.

학창시절이 즐겁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기억력이 안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고통의 기억은 희석되고, 당시의 기억은 좋은 부분만 남아 추억이 되어 버린 사람들.

그러나 나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 입학 첫날, 처음 7교시를 모두 치루고, 나는 이곳이 정신병원이 아닐까, 내가 무슨 부조리극을 보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이상한 곳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곳에서 3년동안 갇혀 지내야 한다는 현실을 참을 수 없어 3월,4월 두달을 지옥처럼 보냈다.
그날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이, 이 영화를 보며 다시 떠올랐다. 그 재현만으로도 잘 만든 영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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