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늪에 빠져 있다. 처음 박상화 번역본 <루친데>를 읽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당혹스러움에 마주쳤다. 혹시 번역 이슈인가 싶어 이영기 번역본을 추가로 읽었다. 처음보다는 좀 낫지만 여전히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 작품 해설을 통해 그나마 어렴풋이 다가갈 수 있었다.
<루친데> 이해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슐레겔의 문학 이론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할 것 같아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박현용 번역본)를 읽었는데 꾸역꾸역 버티다가 3장에 들어가서 완전히 손을 놓아버렸다. 역시 번역 비교를 위해 다시금 이병창 번역본(<그리스문학 연구>)을 펼쳐 든 상황이다. 이마저도 요령부득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그만둘 수밖에 없으리라. 가볍게 시작했다가 된통 당하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루친데>는 ‘소설 이론에 관한 소설’인 것이다. <루친데>가 갖는 이러한 메타소설적 혹은 초월적 특징은 작가 슐레겔의 자의식적 성찰이 소설 내에서, 그리고 소설을 통해서 작용하면서 작품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184-185)
슐레겔은 독일 낭만주의 문학사조의 선구자다. <루친데>가 여느 소설과 다른 근본적 이유는 그의 문학관을 그대로 소설로 형상화해서다. 순전한 예술적 동기에 착안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일종의 경향 문학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에서 문학적 감동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낭만주의 문학 이론이 작품 속에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충실하게 투영되었는지가 작품 이해의 핵심이다. 참고로 <루친데>는 1권만 집필된 미완성작이다.
13편의 텍스트들 또한 편지, 환상, 성격 묘사, 알레고리, 목가, 대화, 성찰 등 단편적 성격의 다양한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인위적으로 잘 정돈된 혼란, 모순들이 만들어내는 매혹적 대칭‘이라는 아라베스크적 특징에 정확히 부합한다. (P.185)
이 작품은 머리말을 제외하고 총 13편의 텍스트 내지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남성 율리우스와 여성 루친데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편은 형식 면에서 자유롭고 독자적이며 율리우스가 루친데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과 루친데를 만나서 사랑을 교감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각 편은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재배열되어 있고 ‘남성성의 수업시대’ 만이 서사적 성격을 띠고 있어 독자에게 상대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온다.
해설에 따르면 슐레겔은 소설을 서사적 산문 텍스트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혼합물로 규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문학은 포에지로서 운문과 시적 정신을 지닌 산문 일체를 포괄한다. 이 작품에 다양한 장르 형식이 사용되는 것은 이러한 의도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율리우스가 루친데에게’에서 이러한 다양성과 혼돈을 표방한다. 작가도 독자들의 당혹성을 예상했는지 ‘어린 빌헬미네의 특성’에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참아달라고 특별히 당부한다.
슐레겔의 이 작품은 당대 사회적 가치관과 배치되는 주장을 담는다. 감정의 자유로운 발산. ‘몰염치에 관한 알레고리’에서 인간의 특성을 몇몇 여인들의 모습으로 알레고리화한다. 언뜻 보아서 아름다운 여인들이 자세히 보니 천박함이 드러나고, 오히려 몰염치한 여인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여성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도자 위트는 전자를 관습적인 견해로 가짜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작가는 ‘무위에 대한 목가’에서 무위와 게으름을 예찬한다. 온화한 고요함 속에서 내적 성찰이 가능하기에, 이에 반대되는 성실과 부지런함은 거부한다. 헤라클레스를 찬미하고 프로메테우스를 폄훼한다. 후자 때문에 인간은 세속적 행위에 매진하게 됨으로써 낭만의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슐레겔에게 있어 진정한 낭만성은 수동성에서만 가능하기에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식물성에까지 다다른다.
성실함과 유용함은 인간에게 천국으로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는, 불타는 검을 가진 죽음의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온화하게, 진정한 수동성의 성스러운 고요 속에서만 오로지 자신의 전 자아를 기억할 수 있으며 세상과 삶을 관조할 수 있다. (P.53)
작가는 낭만성의 본질은 사랑에 있다고 본다. 남성은 천성적으로 사랑을 잘 알지 못한 반면에 여성은 사랑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다. 따라서 여성성을 사랑하고 숭배한다. 율리우스가 삶의 방황을 거듭하다가 루친데를 만남으로써 미숙함과 결핍에서 벗어나 성숙한 삶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남성성의 수업시대’에 잘 드러나 있다. ‘변모’에서 율리우스의 변모를 확인할 수 있고, ‘신의와 장난’에서 사랑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리고 모성을 통해 여성성이 완성의 단계에 도달하게 됨을 ‘두 통의 편지’에서 설파한다.
후반부의 ‘성찰’,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 ‘동경과 평온’, ‘환상의 희롱’은 모호하여 잘 와닿지 않는 대목이다. ‘성찰’은 사유, 성찰을, ‘율리우스가 안토니오에게’는 우정을 다루는 듯한데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동경과 평온’은 낮의 눈부심은 헛된 동경이며 밤의 평온이 참됨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환상의 희롱’은 공허한 오성보다는 순진한 환상의 가치를 상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자신하기 어렵다.
이 소설을 슐레겔의 삶에 빗대어 그와 도로테아 간 사랑의 여정과 현상 이야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을 낭만주의의 완결로 이상화하여 포장한다는 것인데, 부분적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논거가 미약한 느낌이다.
사실 문학사에서 슐레겔은 작가로서가 아니라 문학 이론가로서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형 아우구스트와 그가 주창하는 낭만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문학잡지에 동참하는 여러 작가에 의해 초기 낭만주의 문학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예전에 읽었던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슐레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노발리스는 슐레겔의 절친이자 그의 사상에 열렬한 동조자였다.
<루친데>에 담겨 있는 사랑, 섹슈얼리티, 여성(성)과 남성(성)의 성별 관계, 결혼 제도에 관한 언술은 이 소설이 일으킨 충격적인 사회적 파장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