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류>로 역주행 각광 받는 작가의 데뷔작이다. 표제만 보고 어떤 유형의 작품인지 알기 어려웠다. 영어가 등장하고, ‘빌런’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으니 일종의 SF 소설일 거라고 지레짐작하였다. 막상 소설을 읽기 시작하니 완전히 잘못 짚었다.
작가는 영화 연출을 전공하였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연출한 이력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화 현장 경험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고 하면 지나칠까. 이 소설은 일반 독자가 알지 못하였던 영화 제작과 연출의 생생한 이면이 담겨 있다.
GV 빌런은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성공한 감독과 배우라면 웃어넘길 수 있겠으나 화자처럼 무명의, 실패하고 영화인이라면 전혀 다르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예리하게 가슴 속에 파고든다. 화자가 GV 빌런 다큐멘터리에 착안한 계기도 분명 그에 대한 복수심을 무시할 수 없다.
어렵사리 빌런의 동의를 구하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시작하는 나. 이후 소설의 축은 나와 빌런 고태경의 촬영이 축을 이루는 가운데, 나와 종현의 남녀 관계, 나와 승호의 우정 관계가 주변을 장식한다. 처음에는 단지 빌런으로만 생각했던 고태경의 여러 행동이 영화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이의 실현을 위한 끊임없는 준비와 공부 과정임을 알게 되면서 서사는 크게 방향을 전환한다.
“나 아직 영화인이오.”
고태경이 서늘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P.58)
관객은 영화 자체를 중시한다.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 그리고 제작진처럼 스크린 뒤의 세계는 잘 알지 못할뿐더러 관심도 약하다. 중요한 건 결과로써의 작품이다. 과정에 연출자의 어떤 고충과 한계가 자리 잡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성공한 영화와 영화인,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영화와 실패자로 낙인찍힌 영화인. 현재의 고태경과 화자 조혜나도 엄밀히 말하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풍자처럼 촬영을 시작하였지만, 인간 고태경을 알아가면서 화자는 점차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처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게 사실이다.
두 사람의 다큐멘터리 촬영이 별 볼 일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그들은 계속 그 상태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화자 조혜나 감독은 독립영화지만 어쨌든 영화를 찍었지만 고태경은 불운의 중첩으로 한편도 찍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영화 촬영은 우리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P.138)
여기서 작가는 이들을 양지로 끌어낸다. 망한 작품으로 평가받던 이전 연출작이 뜬금없이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고 특별상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상영한 다큐멘터리는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성공적인 평가를 받는다. GV 빌런으로 비난의 대상이었던 고태경은 졸지에 유명 인사가 되어 관객들의 주목과 응원을 받게 된다. 무엇보다 고태경의 그녀가 뜻밖의 인물이었던 거 하며.
소설의 끝 장면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처지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화자 조혜나 감독은 여전히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만 보다 확실한 삶의 목표는 생겼다. 친구 승호 역시 영화판을 떠났지만 자신의 꿈에 매달린다. 고태경은 이제 빌런 짓을 그만두었을까,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놓지 않았기에 여전히 영화관을 들락거린다.
작가는 과장된 인위적 수사를 최대한 자제하고 담담하게 소설을 전개한다. 굳이 큰 웃음, 사건, 극적 효과를 노리지 않아도 서사 자체의 자연스러운 힘으로 소설은 꽤나 가독성 있다. 은근하고 잔잔하지만 계속 책을 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독자는 누구나 고태경과 조혜나, 승호를 응원하게 될 수밖에 없다. 화자와 헤어졌지만 종현을 우리가 미워할 수 있을까. 작중에서 비교적 악인 역할로 나오는 조병훈 교수 또한 영화에 대해서는 진심이지 않았는가. 박원호 교수와는 결이 다르지만.
자기가 좋아한 것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았다. 우리가 추구하던 꿈과 기대하던 삶이 전부 무너진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P.168)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참으로 영화에 대한 애정이 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가 생활에 쩔쩔매면서도 영화를 놓지 못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소망이 투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는 소설가로 활동하지만 언제라도 기회만 되면 영화인으로 복귀하겠다는. 고태경이 시나리오를 무수히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칫 진부하고 순진한 교훈을 반복하는 유형으로 전락할 수 있는 작품의 구성이다. 독자가 고태경과 채화영의 만남에 긴장과 스릴을 느끼는 심정은 동일하다. GV 빌런이었던 고태경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서서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발언 또한 상식적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영화에의 끈을 놓지 않는 화자가 서서히 영화계에 자리 잡을 전망을 보여준다는 설정도 그렇지 않은가. 이 여러 요소가 소설의 재미와 멋을 흠집 내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보여주는 성실한 애정일 것이다.
화해와 성장. GV 빌런 고태경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서 자신의 삶과 세상과 화해하게 되었다. 화자 조혜나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연출자로서 영화와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층 성장하였다.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승호도 계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게 된다. 중간에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이런 요소들이 우리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갖게 되는 흐뭇한 정서의 기반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 집 단팥죽을 한 그릇 먹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