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식물학자다. 앞서 출판한 <식물학자의 노트>가 좋은 반응을 얻어서 후속작으로 내놓은 게 이 책이다. 저자에 따르면 전자는 본격적인 과학책이며, 이 책은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가 식물상담소를 개소한 후 만난 여러 사람과 사례를 정리하였다. 하다 보면 상담 범위가 반드시 식물에만 국한되지 않기에, 결국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식물 이야기인 동시에 식물을 통해 바라본 인생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식물분류학자이며 식물세밀화가다. 후자는 낯선 용어인데, 책에 수록된 여러 식물과 꽃의 그림과 일러스트는 모두 저자가 직접 그린 것이다. 즉 최대한 과학적 사실에 기반하여 식물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작업도 담당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의 이야기 자체도 잔잔하게 흥미롭지만, 아름다운 식물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낯선 길을 가게 된 배경과 현상을 설명하다 보면 자연스레 저자의 인생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식물상담소에 찾아오는 여러 상담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인생이 빠질 수 없으니. 식물을 관찰하고 키운 경험을 인간사에 비추어보면 적잖은 삶의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
자신에게 맞는 자리에서 크고 멋지게 자라는 열대식물처럼 우리도 각자에게 맞는 자리에서 비로소 멋진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 아닐까? (P.25)
지금 키우고 있는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면 사랑을 줄여보길 권한다. [......] 사랑한다며 나 자신을 좀먹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도 많다. (P.59)
식물은 분명 살아있는 존재이지만, 동물과는 달리 활동성이 즉각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동물에 동정을 품고 보호하자는 사람은 많지만, 자연 전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식물 보호 주장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저자는 식물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편견을 깨고자 하며, 인간 중심적 사고의 무지한 오류를 지적한다.
대표적인 게 잡초의 개념과 역할에 대한 무시다. 잡초는 인간 관점으로 유용성의 기준으로 분류한 것으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다. 익충과 해충의 개념과 마찬가지다. 자연의 기준에서 잡초는 없다. 좀 더 비장한 시각으로 보자면, 관상 용도로 꽃집에서 파는 꽃다발과 화분도 논의에 오를 수 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과, 화원 및 해당 산업에서는 불편하겠지만, 이는 식물의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임은 부인할 수 없다.
플랜테리어도 비슷하다. 분명 식물을 좋아해서 하는 경향이지만, 식물을 생명체가 아닌 인테리어의 일부로서 사물로 취급하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가로수와 정원수도 조경 차원에서 인위성이 개입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일부 농작물 생산을 위한 환경파괴나 그린워싱도 자연과 식물을 산업적으로 보기에 발생한다.
식물학자의 눈으로서는 여러 불편한 진실이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이 책은 대중에게 식물과 친근감을 품도록 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 우리가 미처 간과했던 식물의 본성, 아름다움, 진실을 소개함으로써. 화사한 봄꽃을 피우기 위한 겨울눈이 늦여름부터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자연조차도 준비에 충실하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주목 열매를 먹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열매에 독성이 있다는 점에 놀란다. 산수국은 씨앗으로 번식하지만, 우리가 여름에 보는 아름다운 수국은 인위적인 품종이기에 씨앗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의외다. 신토불이라고 하지만, 식물에는 국경이 없다는 견해도 참신하다. 야생 회양목이 그렇게 크고 멋지다니. 많은 내용이 저자처럼 식물에 애정을 품은 사람들만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다.
모두가 아는 이런 뚜렷한 변화 외에도 식물은 신비로운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식물이 간직한 신비롭고 소중한 비밀들은 아마도 식물 곁에서 식물의 사계절을 계속 지켜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P.102)
실용성이 아니라 순수한 애정으로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저자처럼 식물에 빠져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대단한 용기를 지녀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는 집안의 화분, 집밖의 화단, 멀리 나아가면 공원, 수목원, 식물원, 산과 들을 보면서 충분히 만족할 따름이다. 직접 심고 관리하는 행동은 농작물이 아닌 경우에는 보기 드물다.
대다수의 사람은 어릴 때 흙과 식물을 주저 없이 만지작거리며 놀던 추억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연에서 멀어지는 게 현실이다. 추상적, 관념적으로는 자연을 옹호하고 그리워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마련이다. 전형적인 도시인에 가까운 나로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과 식물을 바라볼 때 허투루 넘기지 말고, 조금이나마 관심과 주의를 더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