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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유다 컨스피러시
  • 옥성호
  • 15,750원 (10%870)
  • 2023-07-14
  • : 205

<잔인한 입맞춤>에 이어 가룟[가롯] 유다와 관련된 책이다. 전자는 예수와 유다 간 은밀한 공조로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유다는 치욕을 감수하게 되었다는 견해다. 여기 저자는 다른 의견을 펼친다. 유다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부정적이며, 설사 그의 실재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와 예수의 공모는 터무니없다고 본다. 유다의 도움은 십자가의 가치와 순수성을 저해하기에 용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유다가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예수를, 십자가로 나아가게끔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죄목은 유대교 근본 교리를 위배하였기에 종교적 사유이다. 그런데 반역자를 처벌하는 로마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건 이상하다. 이 말은 예수가 현실상에서 로마에 저항했다는 의미다. 세계제국 로마에 대항한다면 기독교도는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4대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죽음은 종교적이며, 기독교는 친로마적임을 밝히고, 로마에 저항한 유대민족이야말로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한 족속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유대민족의 상징 인물로 비열한 배신자 유다를 만들어냈다.

 

구약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인 유대민족은 신약에 와서 예수의 비난과 저주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끝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부인하고, 죽게 만든 악역이 되었다. 신약의 모순을 비판하는 견해는 일견 타당성이 있기에 흥미롭다. 유다는 예수의 실제 제자인가, 유다는 푼돈에 눈이 멀어 예수를 팔아넘겼는가, 아니면 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 예수를 죽게끔 만들었는가 등 여러 의문이 생긴다. 사탄의 작용이라면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를 저지해야 하는 사탄이 어째서 유다를 부추겨 예수의 십자가를 강행하게 행동하였는가.

 

1세기 기독교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쓴 게 복음서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만 했다. 기독교인에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민족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을 상징하는 인물, 가롯 유다를 만들었다. (P.23)

 

다만 유대민족을 희생양으로 삼기 위해 유다를 창안하고 이용했다는 견해는 논리적 맥락이 다소 약하다. 로마-유대 전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고 인정하더라도 복음서 저자는 유대인이 아니었는가. 유대인이라면 기독교도 유대인의 생존을 위해 유대교 유대인 동족을 멸족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한 게 아닌가. 유다와 손잡은 유대민족이 결과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완성했다면 오히려 칭찬할 일이 아닌가. 애시당초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타당한 주장인가. 이런 의문이 계속 떠오른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유다의 희생이라는 지분을 인정함으로써, 배신자 유다라는 오명을 벗기고 그의 복권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유다가 나쁜 놈이 될수록 기독교가 산다. 기독교가 사는 길 중 하나가 유다를 ‘더’ 악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P.61)

 

예수와 유다가 공모를 했든지 또는 망설이는 예수를 유다가 유대민족을 이용하여 강제하였든지 유다가 십자가 진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게 사실이라면 더 이상 유다를 배신자 취급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에서는 유다를 인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건 기독교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다.

 

2부에서 저자는 4대 복음서에 가롯 유다의 인물과 역할이 어떻게 변질하는지 자세하게 파헤친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병이어와 향유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와 제자 간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유다의 드러난 배신 동기는 모호하다. 종교적 이유로 해석될 여지도 다분하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걸 우려하였던지 금전적 동기를 제시한다. 다만 그것이 푼돈에 불과하다는 게 애매하다. 돈에 눈먼 배신자가 유대민족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예수를 넘겨주는데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게 설득력이 약하다.

 

<누가복음>은 새로운 동기를 도입하는데, 사탄의 등장이다. 사탄이 유다에게 작용하여 배신하게 했다는 것. 이상하다. 사탄의 개입은 앞서 말한 모순을 낳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능력을 초라하게 만든다. 예수가 사탄의 활동을 몰랐다면 무능하며, 알고 방치했다면 자가당착에 빠진다. <요한복음>에서는 처음부터 사탄이 유다를 사로잡았고, 예수는 이를 알면서도 제자로 삼고 방치하였다. 전지전능한 예수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예수는 유다를 사탄에서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야 자신이 십자가에 오를 수 있으니까. 이쯤 되면 유다를 배신자로 치부하기 곤란하다. 유다는 배우일 뿐, 감독은 예수이므로. 이러한 모순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결말 짓는다.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죽어야 한다. 예수가 살기 위해서는 지난 2,000년 동안 그랬듯, 유다는 오늘도 죽어야만 한다. (P.272)

 

이상 저자의 논리와 견해를 따라가면 신약성경의 여러 모순과 불일치가 분명해진다. 저자의 해석도 날카롭게 틈새를 파헤치고 있어 막연하게 간과하던 복음서의 내용을 깊이 살펴보게 만드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다만 유다의 역할에 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추측에 기반하고 있기에 기꺼이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반기독교적 입장을 시종 드러내고 있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을 취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내포하고 있다.

 

희생양이라는 원시 시스템, 누군가 나 대신 피를 흘려야 내가 산다는 구원의 교리로 움직이는 기독교는 언제라도 새로운 가롯 유다를 만들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도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희생양은 기독교의 본질이고 DNA다. (P.49)

 

인류 역사에 발생한 가장 큰 비극이 뭘까?

예수를 역사로 만든 복음서의 등장이다. (P.274)

 

저자의 분석과 주장은 분명 타당성과 흥미로움을 지니고 있다. 집필 의도가 기획 단계라면 모르겠지만 내용 자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 감정 개입을 통해 객관성이 흔들리게 마련이다. <잔인한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다른 근거 제시 없이 성경 자체의 불일치와 주관적 추정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다수의 동의와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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