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어머니 얘기다. 딸의 관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내용과 방향은 같지 않다. 아버지는 화자의 이십 대에 세상을 떠났으니 화자 개인은 물론 가족과 추억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더하여 부녀간은 결국 성 차이에 비롯하는 이해의 한계에 봉착한다. 어머니는 화자가 사십 대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인생의 여러 국면을 경험한 화자에게는 더욱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하여 모녀간은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지만 종국에는 이해와 화해가 불가피한 관계가 아니던가.
아들은 아버지와 불화하고 멀어지지만 나이 들어서는 자신이 결국 아버지와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한다. 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벼르지만 뒤돌아보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며, 자신이 가장 닮은 사람이 어머니다. 자식은 부모와 애증이 뒤섞인 유전 공동체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P.99)
화자에게 어머니가 더욱 가슴 치밀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쇠약해져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화자가 오롯이 경험해서다. 아버지의 죽음 후 카페 겸 식료품점을 닫고 딸네 집에서 살다가 떨어져 지내기를 반복한 어머니는 좁지만 단칸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간다. 이대로 편안히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노인들의 뇌가 서서히 쪼그라들면서 언어와 사고, 행동을 비롯한 온갖 뇌 기능이 조금씩 삐걱거리다가 끝내 결말에 이르는. 당사자는 오히려 인지하지 못하지만 가족과 자식에게는 씻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불치병. 살아 있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으로 인정받는 서글픈 병. 화자는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P.110)
화자에게 어머니의 삶 전체를 돌아보고 기술하고 묘사하는 과정은 문학적 치장이 아니다. 원초적 본능으로 연결된 감각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며 화자는 어머니에 대해 서술한다. 우리는 소설로 읽지만, 화자는 이 글을 소설로 간주하지 않는다. 소설의 허구성과 장식성이 부재한다면 어찌 소설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작품 속 어머니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성애로 가득한 어머니상과는 전혀 다르다. 훈육에서 폭력을 주저하지 않으며, 애정 발현과 지배 욕망 사이를 넘나들며, 자식은 통제하려 한다. 손님을 대할 때 어머니의 위선적 연기 장면을 서술하는 화자의 회상은 냉철하기조차 하다.
화자가 전작에서부터 보여 준 현실 비상의 꿈과 의지는 확실히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깊게 물려받은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격렬한 의지와 현실 안주에 대한 강렬한 거부는 비록 자신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자식이라도 탈출시키기 위한 맹목적 열망으로 분출하였고 화자가 사립학교에 이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비록 화자는 중산계층에 다가갈수록 부모가 가진 저열한 하층계급의 속성에 진저리치지만 말이다. 자신의 몸과 머리에 밴 저속함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P.63)
자식은 부모의 청춘 시기를 알지 못한다. 활기차고 생명력이 분출하고 꽃다운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어릴 때는 한없이 크고 높은 사람, 청소년 때는 자신을 억압하는 그래서 저항하고 언젠가 극복해야 할 기성세대, 중장년이 되어서는 어느덧 늙고 쇠약해져 보살핌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
나이 들어 노망난 여자와 젊어서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를 통해 합쳐 놓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P.92)
한순간의 단면으로 인생을 깨닫거나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오만에 가깝다. 삶은 불가해한 것이며, 제각기 다르기에 섣부른 예단과 추측을 거부한다. 화자가 전작의 아버지와 여기의 어머니를 각각 대상으로 하여 전기와 행장에 가까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부모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하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쳐버린 삶의 전일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일지 모른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P.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