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열음이 기고한 음악 칼럼을 모은 책이다. 손열음은 외국 유학을 가지 않은 국내 토종 연주자로서 해외 유수의 콩쿠르에 입상한 선구자적 사례의 음악가다. 요즘에야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지만 당시에는 무조건 해외 유학이 필수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2015년에 출간되었으니 그야말로 20대 어린 시절의 글쓰기라고 하겠다.
독자가 이런 유형의 책에서 기대하는 것은 심오하고 사색에 충만한 철학적 내용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클래식 음악의 학술적, 기술적 분석도 원하지 않는다. 그건 순전히 젊은 피아니스트 손열음 자체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 내용으로는 그의 삶과 음악교육 여정, 음악을 둘러싼 신변잡기적 일화일 것이며, 보다 예술적 내용이라면 그가 풀어놓는 클래식 음악 일반과, 클래식 음악계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전체 5부로 구성하였는데, 1부는 ‘피아노와 음악’, 2부는 ‘늘, 우리 곁의 클래식’, 3부는 ‘내 인생의 영감’, 4부는 ‘우리 시대의 음악’, 5부는 ‘손열음, 그리고’이다. 1부는 저자의 악기인 피아노와 관련된 이런저런 주제와 연주자로서 겪는 속성을 주로 다룬다. 리듬치였던 자신이 리듬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한 대목은 절로 미소를 자아낸다. 피아노 조율 음정의 변천사도 새롭다.
무엇보다도 흐뭇한 점은 리듬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된 나 스스로다. 몸으로, 마음으로 리듬을 ‘탈’ 수 있게 된 지금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P.35)
2부에서는 유명 클래식 작곡가와 명곡들에 관한 소개와 그들의 위대성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개진한다. 슈만, 베토벤, 브람스, 모차르트,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등 여느 개론서에서 볼 수 있는 음악가들이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아무래도 연주가답게 현실감이 생생하다. 베토벤의 위대성과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의 의의가 인상적이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자갈들로 만든 석상이 순금보다도 더 빛나는 게 가능할까. 베토벤의 음악이 바로 그렇다. (P.110)
3부는 저자의 음악 인생에서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의 일화와 추억을 담고 있다. 스승과 친우도 있고, 마이클 래빈과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처럼 좋아하는 아티스트도 있으며, 애호하는 곡에 대한 소개도 담고 있다. 바이센베르크를 비교적 애호하는 입장에서 그에 대한 평가와 불운한 음악가 인청쭝이 기억에 남는다
4부는 극성 음악교육과 콩쿠르에 혈안이 된 세태, 클래식 연주자 배출의 강국이 된 우리나라에서 여전한 잘못된 인식, 국내외 음악계의 현상 비교 등 비판과 긍정을 오가는 시선을 통해 요즘 음악계를 바라보는 저자의 심정을 보여준다. 음악 이해의 포용성과 드라마 같은 갑툭튀의 천재는 탄생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다가온다.
일전에 읽은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글과 자연스레 겹치는 대목은 콩쿠르에 대한 건이다. 적절한 평가가 없으면 학습 향상이 낮은 것처럼 분명 콩쿠르는 순기능을 지니고 있지만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성적 순위가 행복의 지수로 간주되는 것과 같은 부작용도 있다. 상반되는 양면성의 조화, 이것은 참으로 지난한 과제이리라.
손열음 개인에 관한 글은 5부에서 주로 만나볼 수 있다. 전 세계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연주가로서의 현실, 자신의 음악교육, 고향, 가족 등 인간 손열음을 가까이할 수 있는 문장들이다. 칼럼을 쓰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자아 성찰도 포함해서.
칼럼 모음집답게 지나치게 사적인 내용은 자제하고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상황을 적절히 잘 섞어서 비교적 읽기 편한 문장을 만들었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균형을 잡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데 손열음은 이를 잘 해낸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지만, 확실히 업계의 전문가만이 알 수 있고 제공할 수 있는 쏠쏠한 정보 취득도 흥미롭다.
이제 저자도 어느덧 저명한 중견 연주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업음반을 지속적으로 출반할 수 있음도, 꾸준하게 연주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이를 입증한다. 요즘도 칼럼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서 쓰는 글은 분명히 십여 년 전과는 다를 것이다. 연주 못지않게 더욱 성숙하고 원숙해졌을 저자의 글쓰기를 확인해 보고 싶다면 과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