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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 11,700원 (10%650)
  • 2015-12-07
  • : 10,611

소설 자체보다도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 이름을 먼저 들어보았다. 물론 보지는 않았지만, 표제가 신기하네 하는 정도의. 나중에 학교 소식지를 통해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고 비로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후 드디어 드라마도 시청하였다. 원작과는 닮은 점도 다른 점도 있지만 무난하게 보기에는 나쁘지 않다.

 

작가 정세랑은 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주로 쓴다. 이 작품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에 올라올 정도로 판타지물의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B급으로 취급받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소설은 허구지만, 현실에 기반하여 그럴듯함을 추구한다. 환상소설은 다르다, 환상 즉, 그렇지 않음을 기반으로 그럴듯함을 지향한다. 이성과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은 상상의, 환상의 인물, 사건, 배경 등을 독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볼 수 있고 나쁜 존재들과 싸워 물리친다. 이른바 유령이나 심령적 존재들과. 작가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미스터리물로 이 작품을 끌고 갈 생각이 없다. 안은영의 무기가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이라는 점이 그렇다. 웃기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악한 괴물과 싸우는데 고작 어린이들 장난감이라는 게.

 

사립 M고는 수수께끼를 지닌 학교다. 수많은 청춘이 목숨을 던진 연못을 메운 자리에 왜 굳이 학교를 세웠을까. 그 음산한 기운의 존재를 승권의 조부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압지석과 정기적인 소독만으로 언제까지나 예방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걸까. 은영 못지않은 능력자 메켄지는 다른 학교도 아닌 여기 사립 M고 영어교사로 왔을까. 역시 학교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은영이 감탄한 승권을 둘러싼 강력한 기운을 빼앗아가기 위한 치밀한 노림수였던가.

 

은영은 슈퍼맨이 아니다. 그녀가 악령과 싸우는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탑이나 성당 등에서 에너지 충전을 해야 하는데, 승권은 그야말로 에너지 덩어리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게 된 것은 사실상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다. 승권은 보이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실연을 경험한 아이들을 홀리는 괴물을 물리쳤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용과 같은 훨씬 더 막강한 괴물과 맞닥뜨리는데, 의도적으로 승권에게 접근하고 은영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해 교묘한 장치를 만들어놓을 정도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작품에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만두지 말아요. 다른 데 가지 말아요.”

“안 그래도 몇 년 더 있으려고요. 이 학교는 잠잠하다 싶으면 더 위험한 게 꼬여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랑 있어요.” (P.271)

 

그리고 위기를 함께 넘긴 두 사람은 달라진다. 역시 이래야 독자의 얄팍한 감정을 기쁘게 한다. 자고로 청춘남녀 주인공은 짝으로 맺어줘야 온당하므로.

 

작가는 은영과 승권이 학교를 지키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기본 틀을 중심으로 자잘한 사건과 이야깃거리를 배치한다. 두 친구 럭키와 혼란, 래디 어머니의 유령, 온건한 역사 교사 등. 특히 역사 교사 사건에서는 역사교과서 왜곡을 유령의 등장으로 해결하는 기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동시에 가슴 아픈 이야기는 옴잡이 여학생과 은영의 옛친구 김강선이다.

 

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술 후에도 혜민의 눈에 옴이 보일 때가 있었지만 점점 희미해졌고 드물어졌다. 어쩌면 다른 옴잡이가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옴 때가 사그라들었을 수도 있다. (P.216)

 

사람이 아니면서 긴 시간을 반복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옴잡이의 사연은 누구라도 연민을 느낄만하다. 당사자가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모르기에 더더욱.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은영의 노력이 아름답다. 위 결과를 보면 옴이 창궐하니 옴잡이가 태어나는지, 반대로 옴잡이가 있기에 옴이 나타나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은영의 친구 강선을 통해 작가는 영혼이 소멸하는 현상을 독자가 관찰할 수 있게 한다. 학창 시절 서로가 왕따로 힘겹게 지내던 때, 강선의 도움으로 은영은 자신의 능력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엉뚱하지만 명랑한 보건교사 캐릭터 설정도 그의 조언을 따른 것이 아니던가. 자신의 출생을 극복하고자 정직한 땀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강선의 죽음은 그래서 더더욱 은영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악귀의 작용이 아닌 순전한 인재(人災)이기에.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나선 금방이었다. (P.193)

 

역사를 공부한 작가답게 역사적 배경을 끌고 와 접목하고,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다루며, 학교와 사회 문제도 슬쩍 건드리며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유령과 귀신 이야기를 다루자면 끝도 없고, 깊숙이 다루자면 한도 없다. 작가는 여기서 에로에로 파워야말로 세상을 끌어가는 원동력으로 보는 듯하다. 에로라고 하니 단순히 에로틱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사랑의 힘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적인 힘 아니겠는가.

 

개개의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한 권으로 다룰만하며, 기본 틀을 이루는 사건도 너무 간단히 쑥쑥 넘어가는 느낌이 있다. 빠른 전개는 장점이지만 독자는 깊은 재미도 느껴보고 싶은데. 한 권으로 마무리하기엔 아쉽다. 작가 스스로 쾌감과 즐겁게 쓴 이야기라고 하였으니, 작가 후기처럼 후속작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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