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세 번째 책이며, 자전적 내용으로는 <침묵의 소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앞서 두 권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이 책도 손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개인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물론 개인적 경험도 언급하지만 이는 저자의 의견 또는 주장을 입증하거나 강화하는 예시로서 기능한다.
저자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에의 지름길인 유명 콩쿠르 입상자 출신이 아니다. 유명 음반사의 눈에 띄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저자의 행보는 독특하다. 편하고 안정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는데 음악원 교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음악 기획사를 차려 틀에 박힌 음악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작년에 나는 비록 가보지 못했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독주회는 보기 드문 대담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강조한 것은 음악에의 순수한 헌신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견디며 저자가 절실하게 깨우친 것은 음악의 순수성과 사회의 비순수성이다. 인종적, 음악적 차별에 주저앉지 않고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침묵의 소리>에서 상세히 접한 바 있다.
성공을 위한 콩쿠르에 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느니, 다시 말하자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오로지 음악 자체에만 몰두하고, 음악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결심이다. (P.41)
콩쿠르는 음악도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도 같다. 저자는 더욱더 비판적인데, 특히나 음악계에 판치고 있는 부조리 사례와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콩쿠르의 심사위원 직을 내려놓으면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사임서’(P.42)는 이에 대한 저자의 강렬한 반응이다.
이 책에 담긴 음악을 향한 사랑과 음악을 대하는 헌신적 태도는 물론 저자 자신에게서 비롯하겠지만, 같을 길을 따르는 후배들이 엉뚱한 길에서 방황하거나 잘못될 길로 향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일념도 담고 있다. 워낙 특이한 저자의 이력을 통해 유형화된 경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음악가로서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예시를 보여주면서.
그렇기에 이 책은 곳곳에 후배들을 향한 절절한 조언과 지침을 담고 있다. 추상적 도덕과 훈계 문구가 아닌 것은 오로지 저자 체험의 산출물인 탓이다. 붉은색 글자 배경의 문장을 유심히 숙독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유명한 것’과 ‘존경스러운 것’에 대한 차이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조건 성공만 재촉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P.162)
또한 무대를 앞두고 겪게 되는 압박과 긴장, 초조를 극복하기 위한 아홉 가지 방법(P.120)은 연주자들도 공연에 앞서 이렇게나 긴장함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저자의 효과적인 경험담을 공유할 수 있어 후배 연주자들 또는 음악계가 아니더라도 강연, 발표를 앞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음악은 자체로 순수하고 아름답고 고상하지만, 음악인은 다르다. 그 또한 사람이기에 생활인으로서 여러 부침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직업 연주자라면 더하다. 무대공연 실패는 경력의 나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간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사교 관계에 애쓰기도 한다. 그럴수록 음악의 순수성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은 몇 개의 음악으로만 한정되고 만다. 저자는 과감한 도전을 외친다.
존재의 감각까지 마비시키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린 생명체, 어둠을 눈부시게 수놓은 별, 하늘을 적시는 황혼, 사랑스러운 이의 얼굴과 같이 시공간의 흐름과 몸의 고통까지도 망각하게 한다. 뇌와 심장도 모르는 사이, 입술 사이로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새어나온다. (P.142)
아름답지 않은가. 이러한 사고를 품을 수 있고 이런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작곡자의 영감을, 연주자를 통해 청중과 교감을 이루어낼 때 우리는 음악에서 지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세속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우리는 구도자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오로지 영혼의 숨결만으로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떤 것도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온전하며 완전하다는 것을 느끼는가. (P.187-188)
익숙한 에세이로 가볍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작의 후반부에서 영적인 충만을 갈구하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의 지향점은 단순히 기교로서, 흥미로운 예능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음악이야말로 언어가 끊긴 곳에서 비로소 의미를 발하는 매체다.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감성과 영성의 순간. 음악의 아름다움이 자체로 아름다운 나 자신과 만나 찬란함을 이루는 때.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음악적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우리는 음악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연주를 아직 좋아하지 못한다. 이전에 층층이 쌓인 수많은 연주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의 연주관에 공감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일까. 다만 저자의 책들을 읽으면서 새삼 그가 음악과,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는 음악 연주만큼이나 글을 잘 쓴다. 그리고 책 뒷부분의 십여 장은 저자의 연주 화보를 흑백으로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