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작가가 설계한 예측 불가능한 함정에 누구라도 빠질 수밖에 없어서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이런 수법은 거의 전적으로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작가는 여기서 탐정 푸아로의 다채로우면서도 뛰어난 역량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애초 초반부터 그를 포로토 씨라는 낯선 영국식 발음으로 주변 인물이 동일인임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한다든지, 그의 직업을 은퇴한 원예가로 하여 방심토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반부에는 탐정으로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푸아로의 유능함을 화자와 함께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푸아로는 고개를 내젓고는 가슴을 활짝 편 다음 우리에게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대단한 인물인 양 으스대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가 정말로 훌륭한 탐정일까 하는 의혹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의 대단한 명성이 혹시 요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P.138)
화자인 의사 셰퍼드와 독자와 주변 인물은 그의 명성에 회의적 견해를 품는다. 제아무리 명성 높은 탐정이라도 이 사건 자체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행방불명된 랠프 페이턴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푸아로의 유명한 회색 세포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른 주변 인물 모두를 향해 질타한다.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며, 아무리 자그마한 거라도 솔직히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용의자들을 안심과 긴장 사이에서 쥐락펴락 분위기를 일변하는 푸아로의 능력에 화자인 의사 셰퍼드는 새삼 탄복한다. 푸아로는 셰퍼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처음 할 일은 그날 저녁 일어난 일을 명료하게 알아내는 겁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P.218)
푸아로는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답니다. 증명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말입니다!” (P.308-309)
작중에서 의사 셰퍼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소설의 전개를 이끄는 중요한 화자인 동시에, 푸아로의 조수 역할도 맡는다. 셜록 홈즈의 왓슨처럼, 푸아로의 헤이스팅스처럼 말이다. 살해된 애크로이드 경의 친구이자,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를 비롯한 집안 사람의 전적인 신뢰를 지닌 인물.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알며, 가십과 본능에 의존하는 누이 캐롤라인과는 차별되는.
“저는 진실을 원해요.”
플로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실을 말입니까?”
“모든 진실을요.” (P.116)
진실은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궁극의 가치인가. 이렇게 푸아로를 개입시킨 플로라마저 진실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살해당한 애크로이드 본인마저 진실을 숨기지 않았는가. 애크로이드 양과 애크로이드 부인, 관리인 러셀 양, 랠프 페이턴, 블런트 소령, 비서 레이몬드, 파커 집사, 하녀 어슐러 본 등 모두가 진실을 은폐한다. 이 정도는 숨겨도 사건 해결에 영향을 없을 거라 판단하면서. 이것을 푸아로는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사실의 불일치에서 그는 단서를 찾고 파헤치고 연결하고 확장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이 작품에는 여러 가정이 등장한다. 만약 애크로이드가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의 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면, 애크로이드가 집안 씀씀이를 구두쇠처럼 가혹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 러셀 양, 파커, 어슐러 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애크로이드가 앞서 독살된 애슐리 페러스 부인과 우정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또 하나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반추하게 만든다. 진범이 처음부터 애크로이드를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개인적 금전 사정의 어려움, 한번 잘못된 선택에 따른 벗어날 수 없이 연속된 패착, 친절과 위선의 일상적 가면을 뒤집어쓴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은닉했던 본성의 가면을 비로소 꺼낸다. 그는 페러스 부인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다지 유감스럽지 않다. 이걸 맞췄다면 나 자신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므로. 그럼에도 푸아로가 결정적인 의구심을 품게 된 단서에 나 역시 약간은 의아한 낌새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소간 뿌듯한 마음도 있다. 다만 스포일러가 될까 봐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감상문 기록이 못 되어 이 점이 유감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