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통해 작가 한강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한강의 책들을 몇 권 집중적으로 읽었다. 동화, 에세이, 시를 제외하고 본격 소설만 꼽자면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여수의 사랑>, <소년이 온다>. 한동안 시들하다가 다시 읽을 생각에 안 읽은 책들을 중고 도서로 차근차근 준비하던 즈음 한강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분명 크게 기뻐할 소식이지만 나만의 숨겨둔 애호 작가가 사라지는 서운함도 어찌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금년도 노벨문학상 작가 독서를 시작한다. 발표 연대 역순으로 첫 번째가 <작별하지 않는다>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 민주화 항쟁을 제재로 하였다면, 이 소설은 제주 4.3 사건을 제재로 삼는다. 두 편 모두 우리 현대사의 묵직한 아픔을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예민한 사안임에도 작가의 용기를 높이 사고 싶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여기서 작가는 직접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화자 경하와, 친구 인선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가 아니다.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대의 참상을 겪은 인물이다. 작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이것이 4.3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사전 지식 없는 독자라면 한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사건에 대한 직접적 언급조차도 작품이 한참 전개된 후에야 비로소 기술된다.
홀연히 제주로 낙향한 인선은 병든 노모를 돌보면서 점차로 사건의 세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하자.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상한 언행의 근원이 고문과 고통의 산물임을 인선이 깨닫게 되었다 하자. 이 모든 것이 인선에게는 깊은 충격과 각성을 주었음은 어쩌면 당연하다. 여기서 우리 독자는 경하를 의아하게 여긴다. 소설가인 듯한데, 광주 항쟁의 여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세상과의 말 그대로 단절을 시도하기도 한 그는 작가 한강의 분신인가.
한강의 문체상 특징으로 ‘시적 산문’이라는 표현을 쓴다. 엄밀하고 상세한 사실적 묘사는 작가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다. 시적 여운과 울림, 그리고 압축과 생략을 통해 작가는 산문 문체의 고유한 개인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에게 있어 사회적, 역사적 사건은 자체로서 그대로 작가에게 투영되지 않는다. 개인적 체현이라는 필터를 거치기에 거대한 스케일의 대하소설과 사회소설을 작가에게 기대하기 어렵지만, 반면 역사성의 내밀한 개인적 감성을 통해 우리는 사건의 본질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 소설을 줄거리 위주의 서사 구조로 보면 맥락이 닿지 않고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현실과 환상이 교묘하게 배합되어 있어 독자는 무엇이 현실이고 어디까지 환상인지 분명히 구별하기 쉽지 않다. 화자가 묻은 새는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화자의 상상에 불과한가. 화자와 더불어 4.3 사건과 그들의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선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나아가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 외딴집에 찾아온 화자가 보고 듣고 생각한 모든 건 사실인가 아니면 눈 속에 고꾸라져 묻힌 그녀가 실제인가.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 (P.194)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광주 민주화 항쟁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실체가 드러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정도 이루어졌다. 반면 4.3 사건은 여전히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나조차도 그런 게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 사건의 실체는 알지 못한다. 작중에서도 군부 치하에서 일체의 진상 파악 노력이 중단되었다고 언급하였듯이 제주도민의 무차별적 학살은 이념 만능주의와 빨갱이를 향한 적대감, 지역감정 등이 결부되어 희대의 사건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글자 그대로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철저한 발본색원?
개인의 존엄성은 집단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이다. 평시에 한 개인의 죽음은 슬픔과 위엄을 지닌 채 존중되기 마련이지만, 대량의 죽음에서 개개인은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수많은 해골과 뼈가 제대로 매장되거나 처치 받지 못한 채 낭자하게 굴러다니는 몰골은 인간성의 민낯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어마어마한 죽음을 건드리면서 하필 작가는 사랑을 꿈꾸는가. 누구의 무엇을 향한 사랑인가. 상실한 오빠와 가족을 향한 인선 어머니의 필사적 사랑, 데면데면했던 모녀 간의 관계가 어머니의 무한한 고통을 인식하면서 깨닫게 된 인선의 사랑, 이념과 야만으로 타락하여 소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외치는 보편적 사랑. 인선은 자신의 마지막 다큐 영화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역사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에 오자, 눈 그치고 다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인선이 말했다.
... 다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P.307)
인선이 필사적으로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초조하게 매진하도록 만드는가. 정작 제안자인 화자는 덤덤한데 말이다. 진실과 화해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지금 이때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그러한가. 이제 사라진다면 더는 기회가 없다. 아직은 아픈 역사를 땅속에 묻고 작별할 때가 아니며, 작별해서도 안 된다는 절박함의 발로.
미약하고 은근하게 시작되어 독자를 어리둥절하고 당혹케 만드는 작품의 전개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밀물의 물결처럼 우리네 마음과 정신을 계속 밀어붙여 후반부에 이를수록 고조되는 감정과 고양되는 영혼의 아픔에 이르게 한다. <소년이 온다>와 마찬가지로 남는 질문 하나. 도대체 인간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