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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책만 보는 바보
  • 회색 여인
  • 엘리자베스 개스켈
  • 12,150원 (10%670)
  • 2022-02-07
  • : 574

<수록작>

회색 여인

마녀 로이스

늙은 보모 이야기

 

개스켈은 일찍이 <크랜포드>를 읽었다. 언젠가 시간을 내서 <남과 북>(또는 <북과 남>)을 읽어볼 생각인데, 고딕 작품을 여러 편 썼다고 들어서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고딕 소설은 요즘으로 치면 장르문학이다. 미스터리, 공포, 환상소설의 요소를 모두 품고 있기에 특히나 19세기 독자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을 지니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고딕 소설의 관건은 역설적이지만 내용의 사실 근접성에 있다. 허구이지만 사실에 가까운 인상을 풍길수록 독자는 더욱 전율할 것이다.

 

순진한 아가씨가 대지주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악명 높은 산적의 우두머리. 무작정 남편으로부터 달아나는데, 철저하게 가면으로 위장했기에 아무도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한시라도 주의를 소홀히 하면 남편의 추격에 붙잡혀 저세상으로 갈 운명에 처한 그녀. 이것이 <회색 여인>의 이야기다.

 

새 남편은 내게 더는 염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지. 내 금발은 회색이 됐고, 얼굴색은 어느새 잿빛이 돼버렸거든. (P.90-91)

 

남편의 마수를 피해 프랑스와 독일 등지를 겁에 질려 아슬아슬하게 떠도는 여인과 하녀 아망테, 악인 남편의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여인과 남편으로 위장한 아망테 두 사람이 불안하지만 단란하게 꾸리는 생활. 항상 두려움 속에 지내다 보니 여인의 아름답던 외모는 시들어서 ‘회색 여인’으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자신의 쓰라린 과거를 여인은 성년이 되어 이제 결혼하려고 하는 딸에게 들려준다. 영원히 자기 가슴 속에 묻은 채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인가. 그 암울하고 잔혹한 과거를 딸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철천지원수 관계라는 끔찍한 진실을.

 

옮긴이는 작품해설에서 개스켈의 고딕 작품을 ‘여성 고딕’으로 칭하면서 여성주의 의미를 부여한다. 여인과 아망테의 동거 생활을 새로운 형태의 부부 관계 내지 동성애 코드를 강조하여 풀이하는데 과도하고 부적절한 해석으로 생각한다.

 

<늙은 보모 이야기>는 고딕 소설의 전형적 유형에 충실하다. 장중하지만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오래된 성이 배경이므로. 뭔가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는 듯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고, 이어서 거기다 유령마저 등장한다. 현실과 환상이 한 시공간에 드러날 때 사람은 기이함과 두려움을 품게 된다.

 

한 남자를 둘러싼 자매의 사랑과 질투, 그리고 증오. 일순간의 감정 폭발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가족을 끔찍한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그리고 매년 되풀이되는 섬뜩하고 괴기한 현상들. 이제는 늙은 퍼니벌 부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유령들에 의해 잔혹한 과거사는 차갑게 재현된다. 유령이 이승을 헤매는 까닭은 이처럼 깊은 한을 품어서일 것이리라.

 

“맙소사! 맙소사! 어릴 때 한 짓은 세월이 지나도 절대 되돌릴 수 없구나! 어릴 때 했던 짓이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다니!” (P.271)

 

아서 밀러의 <시련>은 17세기 미국 식민지 시대에 실제 있었던 세일럼의 마녀재판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갈등과 증오가 광기와 결합하면 얼마나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일을 벌일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사례다. <마녀 로이스>가 제재로 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중편 소설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크게 3부로 구성하였다. 그만큼 작가가 하고 싶고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많다는 뜻이리라.

 

로이스 버클리. 부모의 죽음으로 가까운 친척에게 의탁하기 위해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고아 소녀. 외삼촌네 식구들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는 군식구. 청교도 신앙이 강력한 세일럼에서 그녀는 외톨이 영국 국교회 신자.

 

로이스가 마녀로 지목된 이유는 무엇보다 그녀가 타자라는 점이다. 외삼촌네 식구 아무도 그녀를 변호하지 않고, 그나마 머내시는 광기에 사로잡혀 오히려 그의 변호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나란 존재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내가 나임을, 내가 정상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는 로이스의 외침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마녀가 마녀임을 인정할 리 없으며, 혹 마녀임을 자인한다면 당연하고 확고한 증거가 될 뿐.

 

비겁함은 모두를 잔인하게 만들었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들조차 미신에 사로잡힌 잔인한 박해자가 되어 사악한 세력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P.131)

 

작가는 로이스를 둘러싼 인물들에게 맹목적 비난이 덧씌워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당대 사람들이 목사를 포함하여 마법과 마녀의 존재를 믿고 있었음을 언급한다. 원주민 하녀 네이티는 이러한 믿음에 부채질한다. 놀런 목사를 짝사랑하는 페이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주문을 외고 의식을 행함으로써. 로이스조차도 어릴 때 목격했던 마녀로 누명에 씐 노파의 저주를 떠올리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로이스는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떨렸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과 미신을 이해할 수 없었고, 죄 지은 사람에게 보이는 엄청난 증오와 혐오가 무서웠다. (P.175)

 

그럼에도 광란이 물결이 사라진 후의 세일럼 사람들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여전히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이 이렇게 얄팍할 수 있단 말인가. 로이스의 진술은 차라리 장엄하다. 사방에 인간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녀는 죽음으로써 오롯이 인간이기를 지향한다. 온 세상이 술에 취한 곳에서 맨정신인 사람은 살아갈 수 없는 법이므로.

 

“저는 거짓말로 목숨을 구하느니 양심의 거리낌 없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저는 마녀가 아닙니다. 절 마녀라 하시는데 전 그게 무슨 뜻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용서받을 만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P.221)

 

로이스의 단말마의 비명은 단 한 마디, “엄마!”(P.230)였다.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인간은 극단의 순간에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가장 무섭고 두려워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로이스가 내뱉을 수 있는 다른 말은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그들이 아무리 참회한들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습니다.” (P.231)

 

로이스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휴 루시는 위의 말을 세 번 반복한다. 광기가 스러지고 재판의 당사자들은 장문의 참회문을 남기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의 말마따나 로이스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쉽게 말한다, 자기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왜 자기 잘못을 엄히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가. 상대방이, 국가가, 종교가 그걸 용서해 준다고 하면 그 잘못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치부될 수 있는가. 아서 밀러의 희곡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가슴 답답함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 차오른다.

 

이 작품을 고딕 소설로 분류하는 게 마땅한가. 여기에 고딕 장르의 특성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의 비이성과 광기만 가득할 뿐. 아니다, 전혀 사실 같지 않고 차라리 꿈과 환상이었기를 바라는 무시무시한 현실, 그 자체는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측면에서 지독히 씁쓸하지만 고딕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크랜포드>의 자잘하고 소박하고 안온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작가 개스켈의 본령은 어디에 있는가. 가볍게 펼쳐 들었던 책에서 의외로 섬찟함과 묵직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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