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 돈 다이 The Dead Don’t Die, 2019, 짐 자무쉬
<천국보다 낯선> 이후 자무쉬의 팬이 되었고, 2016년 <패터슨>은 그의 최고의 영화였다. 그가 3년 만에 내놓은 <데드 돈 다이>는, 자무쉬와 좀비영화라는, 잘 매칭되지 않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자무쉬의 영화들이 갖는 미국에 대한 이방인 정서에서 흥미로운 조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부분의 자무쉬의 영화들이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아왔으나, <데드 돈 다이>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은 악평!
나 역시 긍정적인 얘기를 하기 어려웠던 작품. 최근에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생각해본다. 그렇게 악평만 받아야 할 작품이었을까?
당시 악평은 크게 두 갈래였다. 첫째는 메시지 차원. 자무쉬의 영화들은 정치적 메시지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양면성, 의미의 애매모호성, 생의 불합리함과 모순들, 해석의 다양성과 개방성 등으로 평가를 받아왔는데, <데드 돈 다이>는 트럼프 시대에 대한 직접적 은유, 너무 직접적이어서 상투적인 비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냥 누구나 하는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좀비 장르를 통해 했다. 그런 면이 있다. 특히 꼴통 트럼프 지지자와 같이 행동하는 프랭크(스티브 부세미)라는 인물이 사회적 약자와 이민자를 대하는 태도, 은둔자 밥이 직접적인 대사로 표현하는 비판과 비유는 너무 노골적이다.
두 번째 갈래는 좀비장르에 대한 것.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좀비영화 계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 영화에 대한 오마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자무쉬적인 새로운 시도나 상상력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좀비들이 살아있을 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한다거나, 목이 잘릴 때 검은 먼지가 타버린 재처럼 피어오르는 것 등이 다른 좀비영화들과의 차별점이랄 수는 있겠으나 그 또한 상투적. 한 마디로 자무쉬의 좀비영화가 가지는 다른 재미가 전혀 없고 지루하다는 것.
대체로 위의 두 가지 비평에 대해서 반박하기는 어렵다. 자무쉬는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번에 다시 봤다.
첫째, 조금 황당하게 느껴진 젤다(틸다 스윈튼)의 역할. 왜 틸다 스윈튼이란 대배우를 대려다가 장의사이자 검객, 그리고 외계인으로 등장시켰을까? 그녀는 도대체 이 좀비영화에 왜 등장했다가 중요한 역할을 할 듯 하다가 갑자기 우주선을 타고 떠나버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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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시 보면서 그녀의 존재가 각별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에 봤을 때는 산 속에 숨어 사는 은둔자 밥(톰 웨이츠)이 화자, 또는 감독 본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찰자로 보였는데, 젤다가 또 다른 화자, 관찰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무쉬의 대부분의 영화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본 미국이라 할 수 있는데, 종말이 가까워 온 지구에 잠시 들린 외계인 젤다가 자무쉬의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는 페르소나일 수 있겠다. 장의사라는 직업, 인간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그리고 사무라이 검객, 좀비들의 목을 자르는, 그러나 외계인인 그녀는 끝까지 지구를 책임지지 않고 우주선이 오자 휙 떠나버린다. 지구는 지구인들이 지켜야지. 이방인 자무쉬는 아예 지구를 떠나버리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외계인의 시선으로 자기 스스로의 영화세계와 지구에서의 삶을 보고 싶었을까?
둘째, 처음 볼 때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 영화에서 누구도 타인을 단 한명이라도 살린 사람이 없다. 좀비들의 목을 자르긴 하지만 그건 모두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살리기 위한 행동을 한 이는 영화 속에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주인공은 로니(아담 드라이버)와 클리프(빌 머레이)도 한 번도 타인을 구하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화자인 밥은 관찰자일 뿐이고.
문득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캐릭터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어떤 인격을 연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라 배치된 사물 같은, 그래서 인물들이 어떤 사건을 겪으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드라마 구조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그냥 하나의 시, 다수의 인물이 존재하긴 하나 전부 단지 한 명의 화자(감독 자신)가 쓴 시의 일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 그래서 첫 번째 살인을 발견한 현장에 온 로니와 클리프와 민디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이것 역시 시적 반복과 변용으로 읽을 수 있고, 마지막에 로니와 클리프의 대본을 미리 봤다거나 쪽대본만 봤다는 건, 이 장편 시를 쓰고 있는 과정이고, 여기서 마지막 줄을 어떻게 쓸지 감독의 고민을 형상화한 것.
셋째,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유일한 생존자들인, 은둔자 밥과 세 명의 소년원의 아이들. 그 중에서 은둔자 밥은 감독 자신이라 할 수 있으니, 이 세계의 생존자는 아이들 세 명 뿐인데, 그 아이들은 감독이 바라보는 마지막 인류의 희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기후 위기와 지구 멸망이 다가오는 뉴스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헤처나갈 수 있나에 대한 영화. 거기서 어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세 명의 아이를 돕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세 명 스스로 좀비로부터 피해 어딘가로 갈 뿐이다.
두 번째 봤으나 난 여전히 이 작품을 좋아할 순 없다. 다만 <데드 돈 다이>를 통해 그의 고민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고 싶었다. 종말을 향해가는 지구를 바라보며 감독 자신의 시선(밥의 시선), 외계생명체의 시선(젤다의 시선),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장편시 한 편을 쓴다는 기분으로 만든 영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