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존스>, <유로파 유로파> 그리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에 대하여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2차세계대전과 유대인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뤄온 감독. 폴란드 하면 떠오르는 감독이 누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4명이 떠오른다. <철의 사나이>의 안제이 바이다를 필두로, 이후 비슷한 세대의 크르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 로만 폴란스키, 그리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그러나 폴란스키와 키에슬롭스키의 경우 국적은 폴란드이나 폴란드 감독이란 느낌은 강하지 않다. 폴란스키는 헐리우드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만들었고, 키에슬롭스키는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주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폴란드 민족국가의 문제보다는 더 보편적인 유럽 사회 전반의 현대적인 문제를 다뤘다. 프랑스 감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있을 거다.
폴란드 현대사의 비극을 직접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두 감독은 바이다와 홀란드일 거다. 홀란드는 종종 바이다를 자신의 멘토였다 소개하기도 하고, 바이다의 작품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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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드는 1948년 바르샤바 태생이다. 2차세계대전 직후에 폴란드인 언론인 어머니, 유대인 군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홀로코스트 기간 게토에서 부모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인인 어머니는 폴란드 저항운동의 일원으로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여하고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을 돕는 활동을 했는데, 유대인인 아버지는 자신이 유대인이란 사실을 끝까지 부정했다. 아버지는 소련 공산주의에 충성하는 군인으로서 유대사회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홀란드가 유대인의 정체성 문제에 대해 깊게 천착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 느껴진다.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 어떤 집단의 정체성에 대해 쉽게 경계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년시절부터 느낄 수밖에 없었을 듯 하다.
홀란드가 11살 때 부모는 이혼한다.(반체제 운동을 한 아내와 소련에 충성한 남편이 함께 산다는 건 힘들 수밖에 없었지 않을까?) 어머니는 유대인 언론인과 재혼했고, 홀란드는 어머니와 함께 산다. 이혼 2년 후, 홀란드가 13살일 때 아버지는 죽는다. 자살로 분류되었으나 홀란드의 가족들은 모두 그가 공산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믿고 있다 한다. 그렇다면 유대인이었으면서 유대인이란 사실을 부인하고, 스스로 소련 공산주의에 충성했으나 공산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셈이다.
홀란드는 대학을 폴란드가 아닌 체코의 예술대학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프라하의 봄을 겪는다. 프라하의 봄 당시 그녀는 반체제 운동에 동참하다 체포되는데, “정치, 폭력, 아름다움, 예술, 결혼, 영화,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이 체코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이후에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후 그녀는 폴란드로 돌아가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하며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봐도 홀란드가 폴란드와 유럽의 격동의 현대사 한 복판을 관통하는 삶을 살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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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란드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있는 <유로파 유로파>가 유대인문제를 가장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인데, 한국으로 치면 최인훈의 <광장>과 유사한 주제의식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독일 유대인 청년. 어려서 나찌에게 누나를 잃고 폴란드로 떠나 고아원에서 소련 공산당원으로 자란다. 히틀러가 스탈린과의 협정을 깨고 폴란드를 공격하자 피난을 떠나는데, 중간에 독일군에 발각된다. 다행히 그는 독일어를 유창하게 써서 유대인임을 감추고, 러시아어까지 잘 구사해 독일군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게 된다. 소련과의 전쟁 중에 그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워 소련군에 투항할 결심으로 소련군 진영으로 홀로 들어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의 공격과 맞물려 전쟁영웅이 된다. 그리곤 독일 사령관이 그를 양자로 삼기 위해 독일 학교에 보낸다. 그곳에서 그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데, 그녀는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어서 유대인을 증오한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힐 수 없는 그는 그녀를 떠난다.
소련편에도 독일편에도 서지 못하고 자신이 태어난 곳 독일에도, 자란 곳 폴란드에도 있지 못하고, 유대인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전혀 알지 못하는 곳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남도 북도 선택할 수 없었던 이명준이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것과 달리 그래도 그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아버지의 고향이 있지 않냐고 말한다면 그건 다를 수 있으나, 전쟁의 어느 편에도, 이념의 대립에도,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누구도 함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비슷한 맥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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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홀란드의 작품을 보기가 힘들다. 왜냐면 그녀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시대로부터,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봐야 한다.
홀란드의 작품을 보긴 하나 지나치게 시대에 밀착해 있는 비극적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키에슬롭스키의 작품 역시 시대의 공기, 그 안에서 인간이란 모순적 존재의 타자와 관계에 있어 비극적 인식이 있으나 거기엔 동시에 어떤 해방감이 있다. 그러나 홀란드의 작품은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한다. 그래서 보기 괴롭다.
이번 작품 <미스터 존스>는 1930년대 중반 소련의 우크라이나 지역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배경으로 한 작품. 언론인으로 위장해 소련에 들어간 존스가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참상을 지독하게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역시 보기 괴로운 작품이다. 시대의 비극적 운명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 홀란드의 영화를 좋은 작품이라 할 수는 있으나, 그 영화적 스타일을 지지하기엔, 인간이 인간 같지 않고 마리오네트 같다. 저 위에서 신이 연출하는 대로 따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