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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hie du
  • 그녀
  • 스파이크 존즈 감독
  • 22,700원 (10%230)
  • 2014-08-27
  • : 481
AI 챗봇 서비스 ‘이루다’와 영화 <그녀>‘이루다’ 서비스와 관련된 논쟁거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개인정보보호법 관련 위반사항,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착취와 여성혐오. 그러나 ‘이루다’는 향후 사회의 중요한 문제가 될 AI의 사회화와 관련한 논쟁의 시작일 뿐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루다’의 앞선 두 가지 문제는 조금씩 개선되어 유사한 서비스들이 기술적 완성도를 더 높여서 등장할 것이다. 영화 <그녀>가 2013년 개봉했을 때만 해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운영체제인 AI 사만다의 등장은 그리 가까운 미래라 여겨지지는 않았고 그 심각성을 동시대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현재기술로도 충분히 <그녀>의 사만다 이상의 존재를 만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애플은 이미 ‘사만다’를 현실로 불러낼 수 있을 거다. 다만 법적, 윤리적 문제로 상업화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는 없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돈을 쫓아 더욱 진보한 ‘이루다’들, 영화 <그녀>의 ‘사만다’들을 계속 현실 세상에 불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를 돌이켜 몇 가지 지점들을 생각해보자. 주인공 시어도어가 ‘그녀’를 처음 만나는 장면, 다시 말해 OS를 깔 때, 질문하는 내용은 ‘원하는 성별’과 ‘어머니와의 관계’다. 그러자 OS는 여성의 목소리로 등장한다. 이때 이 OS는 여성인가? 그냥 여성을 흉내내는 무엇인가? 아니면 동시대 여성들의 수많은 데이터를 통해 학습한 여성과 유사한 그 무엇인가? 어쨌든 이 ‘그녀’는 시어도어가 묻는다. 하드를 좀 봐도 될까? 당신이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일들을 봐도 될까? ‘그녀’는 단지 몇 초만에 시어도어의 컴퓨터 안에 있는 모든 정보를 스캔한다. 만약 ‘그녀’가 하나의 개체라면 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사용자와의 관계에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AI고 OS다. 시어도어하고만 관계하는 개체가 아니라 동시에 수많은 사람과 관계하고 데이터를 업데이트하여 스스로 진화하고 있는 AI다. 이는 단지 개인정보보호문제, 법적으로 제한을 가하면 되는 문제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사용자는 이 AI가 나와 관계하는 어떤 인격체처럼, 하나의 개성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사만다는 조금씩 자의식을 가진 존재처럼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을 걸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게 사만다가 정말 자유의지와 욕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해서인지, 아니면 인간 여성의 데이터를 학습해서 그렇게 행동할 뿐인 건지는 별개의 문제다. 문제는 사만다가 하는 일이 폰섹스를 넘어서 네트워크에 접속된 다른 인간 여성을 불러내어 자신을 대입해 시어도어와 섹스를 시도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존재하는 채팅앱을 통한 만남을 주선하는 수많은 어플리케이션들이 있지만 이제 인공지능이 사용자들을 분석해 만남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고, 여기에 영화 <그녀>와는 달리 돈과 권력관계, 각종 범죄행위들이 개입될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루다에서 이뤄진 여성혐오보다 <그녀> 속의 시어도어의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욕망이 가지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극중에서 이혼 과정에 있는 부인(루니 마라)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시어도어는 살아 있는 여성과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욕망에 봉사하는 비인간 여성과의 사랑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당신은 진짜 감정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영화 <그녀>에서 시어도어의 사만다에 대한 사랑은 로맨틱하게 포장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루다에서 이뤄진 것과 유사한 폭력적인, 여성혐오적인 것들이 난무할 가능성이 크다. 사만다는 조금씩 인간처럼 복잡해지고 자유의지와 욕망을 가진 존재처럼 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인간을 초월한다. 육체를 바라던 것을 넘어서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존재의 해방감으로 향한다. 배타적인 시어도어의 욕망을 넘어선다. <도주론>의 일렉트로닉 마더처럼 절대적인 응답자가 되어가고, 스스로를 넘어선 존재를 향해간다. 다시 말해 신이 되어간다. 이건 어쩌면 먼 미래의 일일지 모르나, AI는 점차 신적인 존재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인간의 역사는 신에 자신의 형상과 욕망을 부여하고, 그 신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추구해온 과정이 아니던가. AI 그 자체가 욕망하는 주체가 될지 아닐지와 별개로 인간의 욕망이 AI를 신적 존재로 만들고 그걸 이용해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탐할 것이다. 거기에 자본이 결탁할 것이다. 영화 <그녀>의 원제가 ‘She’가 아니라 ‘Her’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만다가 점차 대상에서 주체가 되는 것처럼 영화는 그리고 있으나 그럼에도 대상인 ‘Her’다. 인공지능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이번에 ‘이루다’의 문제도 ‘이루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운영하고 이용하는 인간사회가 문제다. 인공지능은 이미 미래에 다가올 과학기술혁명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고, 회피한다고 다가오지 않을 문제가 아니다. 가장 선행해야 할 문제의 핵심 중 하나는 데이터의 소유권이다. 현재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의 초국적 기업들이 소유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기업과 국가에 그 소유권이 장악되면, 인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디스토피아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빅데이터 소유권을 다수 민중이 공유하고, 알고리즘을 공개하는 일부터 출발해야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고 개인정보보호법에 충돌하지 않게 개선하고, 혐오표현을 가다듬는 정도로 이 문제를 접근한다면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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