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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rep님의 서재
지금 내 앞에 놓여진 책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또 다른 책을 읽어 나간다. 이렇게 끊임 없이 책을 읽고 쌓아가는 일을 반복하면서 이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책읽기를 반복하는건 아닐까? 기계적인 책 읽기의 반복속에 만난 강유원의 "책과 세계"는 책(텍스트)과 세계(컨텍스트)의 역사적 관계 틀속에서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를 붙잡게끔 만든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계와 역사 속에서 텍스트의 근본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책의 저작 의도를 담고있는 서문에 해당하는 ""책과 세계 또는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그의 핵심사유가 잘 드러나 있다. 간략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텍스트는 본래 세계라는 맥락에서 생겨난 것이다. 텍스트 이전에 세계는 자체로 존재했고 인간은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았다. 세계에 대한 반영으로서 텍스트는 어느 순간부터 자체로 일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의 반영을 넘어서 세계와 불일치하는 텍스트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할 도리가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의식적 노력 보다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스스로가 말하고 드러나게 하는 방법으로서 시간순서에 따라 텍스트를 뽑고 그것들이 당대에 어떻게 개입했는지를 살펴 보는 것으로 추체험 해볼 따름이다."

원시문명시대의 쓸쓸한 세계를 거쳐 중세라는 물음이 없는 세계를 지나 차가운 현실 법칙이 지배하는 근대의 쓰라린 세계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을 그 시대의 의미있는 텍스트를 통해 적절하게 파악해 내고 있다. 이책은 서양문명의 사유의 흐름을 명징하게 반영하는 텍스트를 통해 서양문명의 근본에 대한 탐구(강유원의 다른 저작인 "서양문명의 기반-철학적 탐구"에 구체화 되어 있다)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저자는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 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며 자연순환의 톱니바퀴를 빼는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는 책(텍스트)읽기가 갖는 비관적 운명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탐구가 인간과 세계, 텍스트와 컨텍스트, 인간과 텍스트의 접점과 갈등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라는 함유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개념적 파악의 불가능성을 말하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 하는것일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그만두어야 하는가?"라고 물으며 답을 내놓고 있다.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들을 자기 몸에 넣어 보고, 다시 빠져 나와 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 보고, 또다시 빠져나와 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원의 표현대로 한다면 텍스트에 '卽과 對를 차례로 해나감'을 통해 근본에 다가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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