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기획자의 독서>와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를 무척 감명깊게 읽었던 터라, 신작 또한 의심치 않고 구매했다.
처음엔 전작에 비해 임팩트가 다소 적은가 싶더니, 기록을 위해 여러 번 읽는 과정에서 어느새 책의 언어에 깊이 감화되었다.
이전 서적은 어떤 특정한 주제(독서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였다면,
이번 <기획의 말들>은 좀 더 넓게, 기획자로 살아가면서 기억하고 기록하는 여러 말들을 담은 에세이집이다.
'언어'는 이 책의 커다란 축임에 틀림없으나, 내가 개인적으로 이해한 이 책의 거대한 테마는 바로 '태도'의 측면이다.
이 책은 '무엇을(what)'이라거나 '왜(why)'를 다루는 책은 아니다. '기획'이라는 명확한 무엇(what)과 직업에 대한 애정(why)은 이미 작가가 보유하고 있는 무언가다.
그 대신 '어떻게(how)' 기획을 할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일과 삶을 대하는지에 대한 작가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기획을 하는 과정에서, 혹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중간중간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묘사에 무릎을 탁 치기도 했고, 내가 평소에 느끼던 부족함과 관련된 서술에선 반성을 하기도 했다.
'기획의 말들'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무척 섬세한 언어로 쓰여 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는 매력이 있는 글을 잘 쓰셔서, 김도영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기획자를 직업으로 삼지 않아도, 나만의 '-의 말들'을 찾아가고 싶으신 분들 모두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다.
https://blog.naver.com/darjeeling75/223948030623
‘기획의 말들‘이란 결국 기획 일을 하는 누군가가, 일에 대한 고민의 과정 속에서 발견한 소중한 말들을, 나의 생각과 경험을 곁들여, 내 삶 속에 또는 타인의 삶 속에 슬그머니 꽂아두는 작은 메시지 카드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누군가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을 나에게 꼭 맞는 언어들로 건네준다면 우리는 눈앞의 고민을 풀어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를 얻게 되는 셈이니 말이죠.
그리고 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역량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좋은 이야기를 발견하고,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좋은 이야기가 퍼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브랜딩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문장들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래도 나름 이 일을 해오면서 느끼게 된 한 가지는 브랜딩이란 결국 우리 브랜드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게 우리 브랜드를 쓰는 사람들 각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란 사실이거든요. 그러니 애초에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이를 하나의 서사로 완성해내는 데 욕심이 없다면 브랜드를 기획함에 있어 꽤 불리한 출발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입니다.
저는 훌륭한 서사란 사건의 지평선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그 사람의 모든 정보나 조건을 따지는 게 아닌 것처럼 좋은 이야기 또한 이를 둘러싼 규칙들을 무력화시켜서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보거든요. 그러니 가끔씩 ‘그게 왜 좋아?‘, ‘이걸 왜 샀어?‘라는 물음에 뭔가 객관적인 증거들로 설명할 수 없는 가슴 벅찬 이야기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그러다 깨닫게 된 한 가지는 아무리 천지가 개벽하고 AI와 로봇이 우리 일상의 대부분에 관여한다고 해도 내 관점과 표현을 거쳐가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과정이 다른 사람의 능력이나 특정한 기술의 도움을 받기 전에 내 손에서 가장 먼저 다뤄지는 게 훨씬 값지다는 생각에도 이르렀죠.
내 삶은 지금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불러주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들을 어떤 방법과 과정으로 기억하며 숙성시키고 있을까. 아무리 좋은 삶이라도 촘촘하지 못한 기억의 그물을 가지고 있다면 내 이야기는 너무도 쉽게 나를 빠져나가버릴 테고, 뒤늦게 뭔가를 내보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제야 부자연스럽게 짜 맞추는 고행을 반복하게 될 테니까요. 모쪼록 스테이풋 상태에 있는 것들 중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있는 건 무엇일지를 확인하는 것만이 우리 인생을 억지로 만들어가지 않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타인의 반응을 섬세하게 확인하는 습관‘을 중요한 역량으로 꼽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획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까지는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지점에 들어서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나타나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개인의 기량 차이라기보다는 정말 누가 어떤 부분까지 들여다보았느냐의 차이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애정하는 사람,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사용하게 될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 이들이 갖고 있는 눈은 일반 대중의 눈과는 반드시 다른 지점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흔히 말하는 그 ‘한 끗‘이라는 차별화 포인트가 손끝이 아닌 눈 끝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는 편입니다.
세상엔 나름의 이유를 가진 나름의 방식들이 존재합니다.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봐야 비로소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한 줄로 요약하기에는 함축된 의미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말도 있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대할 때는 남들이 놓치기 쉬운 그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받아들인 다음 나만의 방법으로 맛보고 기억하는 과정이 빛을 발합니다. 무엇보다 기획 단계에서 이런 노력은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귀한 역량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죠.
제 경험상 이타적인 사람들이 ‘우와!‘라는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줄 때가 많았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계단을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늘 정체기를 맞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대신 성실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맨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이야기보따리를 열심히 꾸리고, 고객들의 반 발짝 앞에서 그 스토리를 풀어놓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나은 것들을 만들어냈거든요.
만약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거나 다른 사람은 풀지 못한 난제를 해결했다면 그건 아마도 기존 것들을 집요하게 해체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위까지 다 분해해본 뒤에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파악한 다음 어떤 것들끼리 새롭게 결합시켜볼까 고민해봤다는 얘기죠.
혹시나 이 책이 여러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여러분 또한 각자의 말들을 한번 기록해 나가보면 어떨까도 싶어요.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으니 여러분을 둘러싼 세상 속에 존재하는 말들 중 하나를 골라 가벼운 대화를 시작해보는 겁니다.
더불어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아마도 여러분의 말은 전에 없던 힘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나라는 사람을 진하고 또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말. 비록 내가 가장 먼저 하지 않았을지언정 내게 머물며 더 큰 가치를 갖게 된 말. 나를 한 뼘 정도 더 자라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다른 누군가도 충분히 성장시킬 수 있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