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읽었던 책중 가장 좋았던 책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겠다. 읽는 내내 일과 삶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에세이에 깊이 매료되었다.
"올해 한 권의 에세이를 골라야 한다면 이 책이다"라는 이충녕 작가의 말처럼, 양질의 에세이로 추천하는 책이다.
에세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생각해 본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구체적인 삶과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며,
때로는 그 다름 안의 공통점을 포착해내고 때로는 그 판이하게 다른 삶 속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감도가 높아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나는 북경의 택배기사입니다>는 20년간 택배기사, 물류센터 야간직, 자전거 가게 판매원, 주유소 직원 등 열아홉 가지의 직업을 거쳐온 작가의 직업 에세이다.
'일'이라는 보편적인 행위에 대한 통찰과 열아홉 가지의 직업에 대한 무척 구체적인 경험이 녹아있는 이 책을 통해 공감과 이해의 작업을 함께 해낼 수 있다.
하나의 에세이 같기도 하지만,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읽다보면 사회학 내지는 인류학서로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다혜 작가의 말처럼 '구체적으로 치명적인' 노동을 돈으로 교환하는 일과 그 사이에 자라나는 자유에 대한, 때로는 추상적이고 때로는 구체적인 갈망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돈과 일을 맞바꾸는 구체적인 하루를 보내는 동시에 자유와 존엄함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런 보편적인 고민에서 피해갈 수 없는 모든 직업인이라면, 지구 반대편에 있을지라도 와닿지 않을 도리가 없는 책이다.
P.S. 책 자체도 좋지만, 이 책에 대한 작가들의 추천사도 상당히 좋고, 번역도 무척 잘 되어서 완성도가 높다.
후기 링크:
https://blog.naver.com/darjeeling75/223923082864
심해의 물고기는 눈이 보이지 않고 사막의 동물은 갈증을 잘 참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되는지는 내가 처한 환경에 좌지우지되지, 본성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업무 환경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음을, 더 조급하고 쉽게 욱하고 무책임하게 바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지금껏 지켜왔던 기준을 지킬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과연 택배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극소수일 것이다. 어쨌든 나와 내가 아는 택배기사는 누구도 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노동의 가치를 느끼는 순간은 월급이 나올 때뿐이지, 고객의 기쁜 표정이나 감사의 말을 접했을 때가 아니었다. 아무리 타인의 호의가 기쁘다고 해도 말이다.
‘인생은 나선형으로 상승한다‘는 말을 누가 제일 먼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절하고 생생한 비유다. 다만 상승의 폭이 무척 작고 속도가 느리다는 말이 빠져있을 뿐. 인생은 등장하는 이름과 형태만 바뀔 뿐 늘 지난날이 반복되고 우리는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만난다.
이제 나는 젊었을 때처럼 다른 사람에게 나를 증명하려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손해를 감수하려 하지도 않고, 겉과 속이 다르다는 오해를 살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충동은 맹목적이고 헛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므로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진실함을 믿게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진실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실함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흔히들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다고 하는데, 지금 시대에 운명이라는 말은 거창하니 차치하더라도, 성격은 정말로 자신의 인생 행로에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 가령 내가 일해온 경력을 이야기할 때 내 성격적 요소를 빼놓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 내렸던 수많은 결정은 단순히 이해득실의 각도에서 저울질할 게 아니라 내 성격의 영향이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은 뒤 기차역으로 갔다. 텅 빈 거리를 걷고 있자니 만사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렇게 과장된 감상에 젖지 않는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나 진짜 고난을 겪어본 적 없는 내가 만사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하면 비웃음거리밖에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 든 생각과 감정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 태어난 게 꼭 행복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자유는 고도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 추구하는 개인적 갈망과 자아실현이며 타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정신이다. 나는 그런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다양하고 다원적으로, 더욱 평등하고 포용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다각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이제는 내가 했던 모든 일에 감사하고, 당시를 생각하면 그리울 뿐이지, 불만이나 원망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예전에 들었던 그런 마음은 전부 내려놓았다.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원한의 무가치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