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를 지운 영웅: 손기정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마라톤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청년에게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손기정! 그는 올림픽 신기록(2시간 29분 19초 2)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제국 일본의 염원’을 풀었지만, 동시에 ‘식민지 조선 청년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영광스러운 순간 뒤에는 개인의 고난과 민족의 비극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가난 속에서 피어난 마라토너의 꿈
손기정 선수의 삶은 가난과의 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식구가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제대로 된 스케이트화조차 살 수 없었던 소년에게 달리기는 “가난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스포츠”이자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압록강 변을 달리며 다진 실력은 마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약죽보통학교 담임 이일성 선생님을 만나 체계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그의 육상 인생은 전환점을 맞습니다. 특히 19세의 늦은 나이에 육상 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한 것은 그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시대의 모순: 스포츠와 ‘내선융화’
손기정이 성장하던 1930년대는 일제강점기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융화(內鮮融和)’ 정책을 추진하며 스포츠를 민족 통합과 제국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이미 김은배, 권태하 등 조선인 마라토너들이 활약하며 일제는 ‘외지까지 포획하는 제국 일본의 스포츠 상황’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 선수들의 복잡한 심경은 로스앤젤레스 한인들이 게양한 태극기와 가슴에 달아야 했던 일장기 사이의 괴리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승리는 ‘일본 대표 선수’로서의 영광으로 포장되었지만, 조선 민족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향한 질주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은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기에 ‘헝그리 정신’을 길러냈습니다. 그는 경성이라는 중앙 도시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차별을 느끼며 민족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손기정은 1933년 비공인 세계 기록을 상회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마라톤 영웅’으로 떠올랐고, 남승룡, 류장춘 등 조선의 라이벌들과 함께 기량을 갈고닦았습니다. 1935년, 그는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 기록(2시간 26분 42초)을 수립하며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에 가장 가까운 선수로 주목받습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그의 활약이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며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시상대의 그림자: 고개 숙인 영웅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을, 남승룡 선수는 동메달을 획득하며 조선인 두 명이 육상 경기의 꽃인 마라톤에서 나란히 시상대에 서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조선 출신 청년이 실현한 꿈’이자 ‘조선 민족에게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 ‘기미가요’가 흘러나오고 일장기가 게양되자, 손기정 선수는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리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영웅이 된 승자는 그 시간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당시의 묘사처럼, 이 순간은 개인의 위대한 승리 뒤에 가려진 식민지 청년의 비극적인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금메달은 단순한 스포츠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을 딛고 세계 최고가 된 한 개인의 집념인 동시에, 민족의 억압 속에서도 ‘우수성’을 통해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조선 민족의 간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손기정은 결코 원하지 않았던 ‘일장기’ 아래에서, 자신의 영광을 조국 광복의 염원으로 승화시켰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손기정 평전: 제국의 트랙을 딛고 민족을 넘다』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삶을 단순한 영웅 서사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가 살아야 했던 시대적 모순과 정치적 압박, 그리고 해방 이후의 복잡한 행보를 객관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분석하며, 스포츠와 정치의 얽힘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 책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제국 일본의 스포츠 정책과 식민지 조선인의 갈등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단순한 전기적 서술이 아닌, 제국과 민족, 영광과 고통, 스포츠와 정치 사이의 틈에서 손기정이 짊어졌던 무게를 조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손기정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일본 쪽의 여러 자료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다소 모호하게 알려진 사실까지 검증하며 손기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교수신문(http://www.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