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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엉망진창

 

 

우선, 인용 하나.

어느 날, 달걀 껍데기 속에서 맥주를 빚던 이가 거기 빠져 몸을 데었다. 이 광경을 바라본 벼룩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벼룩 옆에 있던 문짝도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이가 데었기 때문이야.” 벼룩의 대답에 문짝은 갑자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 소리를 듣고 빗자루가 왜 그렇게 삐걱거리느냐고 묻는다. 문짝이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삐걱거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들은 빗자루는 갑자기 방을 쓸기 시작한다. 마차가 지나가다 이 장면을 보고 왜 비질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빗자루는 답한다. “어떻게 내가 비질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대는데.”

이에 마차는 갑자기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한다. 길가의 거름더미가 왜 그렇게 달리느냐고 마차에게 묻는다. 마차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달리지 않을 수가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하고 있는데.” 거름더미가 미친 듯 타오르기 시작한다. 근처의 작은 나무가 왜 그렇게 타느냐고 묻는다. 거름더미는 답한다. “어떻게 내가 타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고 있는데.” 이 소리를 들은 나무는 온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젊은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다가 나무에게 왜 그리 흔들어 대느냐고 묻는다. 나무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온몸을 흔들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지, 거름더미는 타고 있는데.”

여자는 “그렇다면 난 내 물동이를 깨뜨려야겠군”이라 말하고는 들고 있던 물동이를 깨버린다. 샘물이 놀라 왜 물동이를 깨느냐 묻자 처녀는 대답한다. “어떻게 내가 물동이를 깨뜨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데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짝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비질을 하지, 마차는 내달리지, 거름더미는 타고 있지, 나무는 온몸을 흔들고 있는데.” 샘물은 말한다. “맙소사, 큰일이로군! 그렇다면 나는 마구 흘러내려야겠군.” 샘은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이 바람에 처녀, 나무, 거름더미, 마차, 문, 벼룩, 이는 다 휩쓸려 빠져 죽었다.

그림 형제의 〈이(蝨)와 벼룩〉이라는 동화다(그림 형제, 1999: 192-195). 몇 년 전 우연히 《그림 형제 동화 전집》을 펼쳐 보다가 이 이야기를 발견했다. 심오한 철학적 메시지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숨겨진 지혜나 비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묘한 매력이 있었다. 뭔가가 저기 있다. 중요한 인식적 가치를 지닌 무언가가 저 이야기 속에 있다. 그 ‘무언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다가 나는 그림 형제의 〈이와 벼룩〉이 서술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세계가 사회 이론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 그리는 세계가 그것이다. (김홍중, 「그림형제와 라투르: ANT 서사기계에 대한 몇 가지 성찰」, 『문명과 경계』, Vol.6, 2023.3, 13-48쪽.)

 

이 이야기를 서두에 꺼낸 후, 김홍중 선생은 이솝의 <이와 벼룩> 동화를 끄집어낸 이유가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크워크 이론이 그리는 세계와의 유사점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번에는 『스토리 리부트: 이야기는 어떻게 생성되는가』(김만수 지음, 알렙 펴낼 예정)에 실린 글 인용. 여기서 소개하는 <이와 벼룩> 이야기는 그림 형제 원작, 김경연 옮김, 『그림 형제 민담집』(현암사, 2012), 190쪽에서 요약했다.

두 번째 인용.

 

그림 형제 민담집에 실린 「이와 벼룩」은 참 엉망진창이다. 한 집에 이와 벼룩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달걀껍데기에 맥주를 빚다가 그만 이가 맥주에 빠져 화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벼룩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사연을 들은 문이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또 그 사연을 들은 작은 빗자루가 바닥을 쓸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사연을 듣는 순서대로 수레가 달리기 시작하고, 거름더미가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나무는 몸을 흔들기 시작하고, 소녀는 물동이를 깨뜨린다. 화자는 물동이를 깨뜨리는 소녀에게 “소녀야, 왜 물동이를 깨버리니?”라고 묻는데, 소녀의 답변은 매우 길지만 단순하다. “물동이를 깨뜨리지 않을 수 있겠어? 이는 화상을 입었지, 벼룩은 울고 있지, 문은 삐걱거리지, 빗자루는 쓸고 다니지, 수레는 달리지, 거름더미는 타오르지, 나무는 몸을 흔들지.” 물론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데, 이들의 대화를 엿듣던 샘물이 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아이 참, 그렇다면 나는 밖으로 흐르기 시작해야지.” 샘물은 깜짝 놀라 밖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소녀, 나무, 거름더미, 수레, 빗자루, 문, 벼룩, 이 모두 물속에 빠져 죽고 만다.

이와 벼룩이 맥주를 빚는다는 상황 자체도 황당하고, 별것도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들어, 모두가 엉망진창이 된다는 이야기 자체가 정말 엉망진창이다. 왜 민담의 전승자들은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을까. 민담의 수집가나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이야기가 엉망진창인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엉망진창일 수 있다는 것, 인생살이의 전후에는 어떤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우리 인생의 우여곡절이 맥주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등을 이런 방식으로 전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최근 이 민담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 Network Theory, ANT)’이 사회 이론에 기여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 멋지게 인용되었다. 라투르는 사회학 이론이 추상적 개념과 복잡한 공리의 집합이 아니라, 독특한 서사와 감흥의 힘으로 충만한 이야기여야 함을 강조한다. 사회학 이론은 체계화된 담론이 아니라 파괴, 관조, 서사의 복합적인 수행이라는 것. 그는 이를 독특한 ‘서사 기계’라 명명한다. 세계는 이론과 상관없이 “이미 맹렬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은 그의 맹렬한 말을 들어주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는 ‘이와 벼룩’이 말하는 것도 맹렬히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주석으로 김홍중, 「그림형제와 라투르: ANT 서사기계에 대한 몇 가지 성찰」, 『문명과 경계』, Vol.6, 2023.3, 13-48쪽.을 달아두었다.)

 

위의 김홍중 선생님의 글이나 김만수 선생님의 글이 일맥이 상통하다는 점 외에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알렙에서 간행되었(된)다는 점이다. 이와는 공통점이 없는 또 다른 <이와 벼룩> 이야기. 이번에는 한국 설화이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세 번째, 이것 또한 인용.

 

옛날 어떤 중이 깊은 산골에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옷에 이가 끓어 중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중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아, 전념하여 도를 닦을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중은 이들을 불러 놓고 약속을 했다. “이봐, 내 말을 들으라고. 아무리 너희들이 미물이라지만, 내가 지금 도를 닦는데 그렇게 방해를 해서야 쓰겠니? 그러니 앞으론 내가 도를 닦는 동안은 절대로 물지 말고, 쉴 때에만 물도록 해라. 내 말 알아듣겠니?” “네, 알았어요.” “그리고 이 약속은 절대로 다른 것들에겐 말해선 안 돼. 그것도 약속하겠니?” “알았어요.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는 우연히도 벼룩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벼룩이 이를 보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야, 이야. 넌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도 오동통 살이 쪘느냐? 참 부럽다야. 그 방법 좀 내게 가르쳐 주지 않을래?” 이는 살이 쪘다고 벼룩이 칭찬하는 소리를 듣자, 어깨가 으쓱해지며 코가 시큰했다. 이런 칭찬 소리에 팔려, 이는 그만 중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자랑삼아 그 비밀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벼룩도 이처럼 중이 도를 닦다가 쉬는 때를 기다려 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중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얼굴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을 활활 벗고는 자기 옷을 불에 태워 버렸다. 이 바람에 옷에 있던 이도, 벼룩도 그만 다 타 죽어 버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무엇이 살생을 금하고 수도에 정진하라는 스님의 마음에 불을 질렀을까. 물론 스님은 이도 벼룩도 직접 잡아 죽이지 아니하고, 자신의 옷을 불태웠을 뿐이다. 다만, 그 옷에 이와 벼룩이 있었을 뿐이고.

인과응보. 약속을 깨뜨리고 비밀을 누설한 이나 중의 몸에 붙어 살을 물어뜯는 벼룩이나, (미물이라도 생물이라면 억하심정이야 있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지은 존재. 죄(=인과)는 곧 응보(관계)라는 게, 이 설화의 교훈이다.

 

서양의 아이소포스(이솝)의 우화는 삶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말해 준다. 경기도 포천에 구전되는 이 우화도 뚜렷한 인과관계는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약속을 깨고 비밀을 터뜨리면 응당한 대가가 따른다. 자고로 말이 많으면 안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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