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라는 직업인의 기쁨과 슬픔
magpieditor 2025/08/16 22:24
JTBC 뉴스룸 메인 앵커로서 당당하고 화려해 보였던 한민용 작가님이 얼마나 자기 일에 진심인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앞날이 막막했던 기자 지망생 시절을 읽을 땐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나의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보았고, 하리꼬미(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취재하는 일)를 하며 사람들을 사귀고 신뢰를 쌓아가던 대목에서는 형사님들의 거친 농담 한 마디에 괜히 웃음도 나고 작가님을 읏차읏차 응원해주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죽음 앞에서 그 실상을 정확하게 보도하려고 애쓰며 목도한 장면들은 다음 장으로 넘기기가 어렵게 눈물이 났다. 『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는 기자라는 직업인의 기쁨과 슬픔 같기도 했는데, 그간 TV와 기사로 접한 뉴스가 책을 통해 단순 텍스트를 넘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경험을 했다. 나의 세계가 이 책의 크기만큼 확장된 것 같아 기쁘고, 임부복 정장을 입은 앵커를 뉴스에서 볼 수 있어서 그 또한 너무나 기쁘고 어떤 면에서는 짜릿하기까지 했다. 일과 삶의 치열한 현장을 이렇게나 유려한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니 참말로 좋았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기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기자들은 모든 주제를 ‘얘기된다’와 ‘안 된다’로 분류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기사화할 수 있는 이야기를 빠르게 건져내야 하다보니 그렇게 훈련된 것 같았다. 그들은 처음 들어보거나 특별히 감동적이거나, 어떤 이유로든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면 ‘얘기된다’, 흔해빠진 이야기라 절대 기사화할 수 없다고 여겨지면 ‘얘기 안 된다’라고 평가하곤 했다.- P74
"잘 모르면 욕하기는 쉬워도, 제대로 비판하긴 어려운 법이지. 아 물론, 가까워지면 비판하기 어려울 때도 있어.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해. 그거 못 하는 순간 기자 아니고 업자 되는 거야."- P83
하리꼬미를 하며 쏟아부은 시간은 나를 민간인에서 기자로 단숨에 탈바꿈시켜줬다. 일단 부딪쳐보며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빠르게 없애줬고, 기자 생활 내내 따라다닐 문전박대나 반감, 배척에도 익숙하게 만들어줬다. 무수히 반복했던 시행착오 덕에 착한 제보자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은 아니고, 나쁜 사기꾼이 하는 말도 모두 거짓은 아니며, 정의로운 경찰관이 하는 말 역시 다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깨우칠 수 있었다. 사람은 타인을 속이겠다는 악의 없이도 결과적으로는 속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실이 곧 진실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점도.
무언가를 잘하려면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어쩌면 뻔하고 당연한 가르침을 경찰서를 뺑뺑 돌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우친 뒤, 나는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 잘해내고 싶은 일에 시간을 쓰기로 했다. - P113
사실 기자에게 중요한 건 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을 사귀고 신뢰를 쌓는 수단이다. 술 말고,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신뢰를 쌓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그것을 숙취 해소제를 사러 갔던 편의점에서 찾았다. 쌍화탕. 그날부터 패딩 양쪽 주머니에 따뜻한 쌍화탕을 꽂고 다니며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형사님들의 새빨개진 손에, 추위를 뚫고 경찰서에 도움을 청하러 온 민원인의 떨리는 손에 쥐여주었다. 쌍화탕을 쥔 그들은 나를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는, 혹은 자신의 두려움을 알아주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생각해주었다.- P128
그 탓에 원고에 담은 것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어야만 하고, 또 그것들을 정제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훈련도 돼 있어야 하지 않나. - P189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그 답은 명사가 아닌 동사여야 한다. 그러니까 "뉴스 앵커요" 혹은 "기자요"라는 답은 땡- 오답이다.
"저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찾은 답은 이거다. 내가 해온 일의 본질이 설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게는 해돋이를 보며 어떤 새해 소원을 빌었는지 카메라에 대고 말해달라는 것부터 크게는 권력자를 끌어내릴 만한, 깊숙이 숨겨진 비밀을 털어놓으라는 것까지, 모두 설득이었다. 이제까지 내가 써온 기사나 앵커 멘트 역시 설득하기 위해 쓰인 글이었다.- P194
나는 앵커야말로 언제나 내가 아닌 남을 향해 레이더를 바짝 세워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시청자를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동료들의 이야기도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기사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기사의 의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제대로 살려낼 수 있다.
- P229